20세기 이야기

‘트루먼 독트린’은 미소 냉전시대의 개막 알리는 시발점이고, ‘마셜 플랜’은 유럽의 경제 부흥책이자 동서 냉전의 본격적 출발점

↑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는 트루먼 대통령

 

그리스에 3억 달러, 터키에 1억 달러의 군사원조 제공과 군사고문단 파견

2차대전 후 유럽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미·영 연합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지역은 발칸반도와 폴란드였다. 미국과 영국은 전쟁이 끝나기 전 이미 소련군이 점령한 동유럽에 대해서는 소련의 기득권을 인정했으나 동부 지중해에 연한 발칸반도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발칸반도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가을 독일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후 사실상 진공 지대나 다름없었다. 친(親) 공산당 계열의 레지스탕스 부대가 이런 틈을 이용해 이곳을 차지하려 하자 다급해진 영국의 처칠 총리가 급거 소련으로 날아가 1944년 10월 이른바 ‘사악한 문서’로 불리는 합의서를 주고받았다. 5개 발칸 국가 중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소련 권에, 그리스는 영국 권에, 유고와 헝가리는 영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관할하는 완충지대로 둔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영국은 이렇게 그리스에 대해서만은 배타적 권리를 인정받았으나 종전 후 그리스에서 영국이 지원하는 아테네 반공 정권과 그리스 북부의 친공 레지스탕스 부대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미·영과 소련은 폴란드에서도 이해관계가 충돌했다. 폴란드는 다른 동유럽 국가가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어버린 것과 달리 미·영이 지원하는 런던의 망명정부와 소련군이 후원하는 폴란드 임시정부 사이에 정통성을 둘러싼 분쟁으로 대립이 첨예했다. 미국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폴란드 망명정부와 임시정부의 교섭을 거쳐 신정부를 수립하기로 소련과 합의했으나 소련이 일방적으로 폴란드를 점령하자 분통을 터뜨렸다.

이처럼 미·소 양국이 폴란드를 둘러싼 신경전을 벌이고 있고 그리스에서도 내전이 장기화할 조점을 보이는 가운데 1947년 2월 영국이 더 이상 해외 경비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며 그리스 주둔 영국군을 1947년 3월 말까지 철수하겠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그 틈을 이용해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공산주의 세력이 내전을 일으켰다. 여기에 터키마저 소련의 팽창 정책에 위협받게 되자 미국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리스의 아테네 반공 정권이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이게 되자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이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트루먼 독트린’으로 알려진 특별교서를 발표했다. 공산주의의 위험이 매우 높은 그리스에 3억 달러, 터키에 1억 달러 등 총 4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미국은 유럽의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지원한 구세주

미국의 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유럽에 대한 경제원조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의 경제 사정은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 유럽 최대의 비극’이라고 할 만큼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물자 부족, 재정 압박,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 한파가 유럽 곳곳에 몰아치고 설상가상으로 1946년 겨울 유럽 전역에 유례없는 한파가 몰아닥쳐 수많은 동사자와 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벨기에, 프랑스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이 영향력을 확대했다. 유럽의 좌익 세력은 전후 경제 회복의 부진에 따른 대중적인 좌절과 불만을 토대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서유럽에서도 사회주의 국가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미국은 소련의 항구적인 동유럽 지배와 공산당의 서유럽 집권을 우려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을 지원할 수 있는 구세주는 오직 미국뿐이었다.

미국이 유럽의 경제 부흥책인 ‘마셜 플랜’을 발표한 것은 1947년 6월이었다. 조지 마셜 미 국무장관이 6월 5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하는 나라들이 그들의 국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집행하는 계획에 대하여 미국은 대규모로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연설한 것이다. 원조는 미국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유럽이 경제적으로 살아나야 전쟁 중 빌려준 빚을 되돌려 받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 미국의 상품 시장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영국, 프랑스, 소련의 외무장관이 만나 마셜 플랜을 수용할 것인지를 논의했으나 소련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내정 간섭이고 유럽 제국의 경제적 독립과 주권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반대해 의견 통일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 내 22개국에 참가의사를 물었고 그 결과 16개국 대표가 파리에 모였다. 당초 참가 의사를 표명했던 폴란드와 체코는 소련의 압력으로 최종 단계에서 참가를 거부했다. 결국 그 시점부터 동서 유럽이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파리 회의는 동서 냉전의 출발점이었다.

 

미·소 간, 동·서 유럽 간에 메울 수 없는 틈 벌어져

유럽이 마셜 플랜을 수용할 뜻을 보이자 미국은 경제협력법을 제정했다. 1948년 4월 3일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과 함께 경제협력법이 발효되자 미국은 마셜 플랜을 관장할 경제협력국(ECA)을 설립했다. 서유럽 국가들도 마셜 플랜의 원활한 집행을 위해 유럽경제협력기구(OEEC)를 발족했다. 유럽의 16개국은 유럽경제협력기구에 4년간 224억 달러의 원조를 요청했다. 미국은 1952년 6월까지 4년 3개월 동안 서유럽 16개국에 130억 달러를 원조했다.

4년 동안 시행된 마셜 플랜의 성과는 괄목했다. 몇몇 서유럽 국가들의 국민총생산은 15~25%까지 증가하고 화학·기계·철강 산업이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 경제 역시 가파르게 성장했다. 서유럽 국가들이 마셜 플랜의 원조액 70%를 미국의 잉여농산물과 생활필수품을 수입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국의 수출시장은 확대되었고 서유럽 국가들의 대미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원조가 군사원조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1949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을 계기로 마셜 플랜은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과 정치군사적 대결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탈바꿈했다. 미국은 1952년 마셜 플랜이 종료되자 상호안전보장법을 제정해 원조를 계속 이어갔다.

서유럽의 생활수준이 점차 높아지고 유럽의 통합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마셜 플랜은 성공적이었다. 또한 서유럽 국가들이 원조금의 대부분을 미국의 생산 설비와 물품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고 그 덕분에 미국 경제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다는 점에서도 윈윈 게임이었다.

그러나 마셜 플랜을 기점으로 미·소 간 그리고 동·서 유럽 간에는 경제·정치적으로 메울 수 없는 틈이 벌어졌다. 1947년 7월에는 동유럽의 부흥 계획 ‘몰로토프 플랜’이 발표되고 1947년 9월에는 서유럽의 움직임에 대응한 공산주의 국제조직 ‘코민포름’이 결성되었다. 그때부터 미소 간에 ‘냉전’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기 시작했다.

2000년 미국에서 450명의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를 상대로 ‘지난 50년간 미국 행정부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마셜 플랜을 제1로 꼽았을 만큼 마셜 플랜이 서구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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