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50년 전 대만의 유엔 축출과 중국의 유엔 가입 과정…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교훈 남겨

↑ 1971년 11월 15일 유엔 총회에 처음 참석한 중국 대표단의 모습을 사진기자들이 찍고 있다.

 

by 김지지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국제 무대에서 대만 역할 확대에 힘을 쏟으면서 대만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5월 24일 개최되는 제74차 세계보건총회(WHA) 연례회의에 대만을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시켜 달라고 세계보건기구(WHO)에 요청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에 앞서 5월 초 열린 G7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와 WHA(세계보건총회) 참여를 지지한다는 내용을 공동성명에 포함시켰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하나의 중국’ 원칙은 유엔 결의 2758호와 WHA 관련 결의에서 확인한 기본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유엔 결의 2758호는 1971년 중국이 유엔에서 유일하게 합법적 권리를 가진다고 결정함으로써 중화민국(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한 결정이다. 1971년 10월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졌는지를 살펴본다.

‘중국이 유엔에서 유일하게 합법적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한 엔 결의 2758호 문서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 과정

 

중국, 1950년부터 유엔 가입 시도했으나 번번이 미국에 가로막혀

모택동의 공산당이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를 상대로 한 오랜 국공내전에서 승리함에 따라 장개석은 대만으로 쫓겨나고 모택동의 중화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9년 10월 1일 수립되었다. 그러나 유엔이 인정하는 중국 정부는 공산당 정부가 아니라 미국의 지지를 받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였다.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50년부터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다”고 천명하면서 “대만은 중국의 영토이므로 대만 정부 대표를 즉각 유엔에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정부 대표를 유엔 주재 중국의 유일한 합법대표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번번이 미국에 가로막혀 실현되지 못했다. 덕분에 대만은 유엔에서의 지위를 온전하게 유지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북경의 천안문 성루 누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1950년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자는 ‘소련안’과,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자는 ‘인도안’이 별개로 유엔에 상정되었으나 두 안 모두 미국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했다. 첫 실패 후에도 중국의 유엔 가입안은 매년 총회에 상정되었고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61년 알바니아를 비롯 10여 개국이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이른바 ‘알바니아안’을 유엔에 상정했다.

미국은 전과 같은 대처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국의 유엔 가입을 “유엔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는 ‘중요사항’으로 지정해 유엔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중요사항’ 지정은 진입 장벽을 과반수 의결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결로 높인 맞불작전이었으나 이것이 효력을 유지하려면 매년 총회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그 무렵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제3세계의 다수 국가들이 유엔에 속속 가입함에 따라 유엔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이들 국가들과 관계를 긴밀히 하면서 영향력도 함께 커졌다.

문제는 대만의 축출이었다. 미국은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해 최소한의 저지 노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려면 3분의 2 이상의 의결이 필요하다”는 이른바 ‘역중요사항 지정안’이었다. 물론 유엔의 총회를 거쳐야 했다.

 

대만 대표, 패배 예상하고 투표 시작되기도 전에 대회장 떠나

미국의 집요한 방해로 좀처럼 성사될 것 같지 않던 중국의 유엔 가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미국 측의 ‘중요사항’ 지정안이 66대 52로 여전히 찬성표가 많긴 했지만 ‘알바니아안’도 사상 처음으로 51대 49로 다수 지지표를 얻었다. 아직 3분의 2 의결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과반수의 의결이 주는 상징성은 컸다.

그런 가운데 1971년 들어 중국 외교사에 중대 변화가 생겼다. 그해 4월 미국의 탁구 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하고 6월 10일 닉슨 대통령이 대 중국 금수조치를 해제함으로써 미·중 간에 화해 무드가 새롭게 조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6월 11일 리비아가 대만과의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중국을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대만 63개국, 중국 62개국이던 수교국가 수가 하루 만에 역전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국도 중국과의 화해를 선택한 마당에 굳이 중국의 유엔 가입을 적극적으로 막을 생각이 없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에 오른 미국 탁구 대표팀 (1971.4)

 

이런 제반의 문제를 결정할 유엔 총회가 열린 것은 1971년 10월 25일이었다.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이 동시에 이뤄지도록 하는 ‘알바니아안’과, “대만을 유엔에서 축출하려면 3분의 2 이상의 의결이 필요하다”는 ‘역중요사항 지정안’ 중 어느 것을 먼저 표결에 붙일 것인가를 정하는 표결에서 유엔 총회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단지 순서를 정한 표결이었으나 미국은 마치 본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 고무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역중요사항 지정안’은 찬성 55, 반대 59, 기권 15, 불참 2로 부결되었다.

다음 순서인 ‘알바니아안’ 의결에 앞서 미국의 조지 부시 유엔 대표는 알바니아 결의안을 중국 가입과 대만 축출로 분리표결하자고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절차상 합당치 않다는 말리크 총회 의장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러자 패배를 예상한 대만 대표는 투표가 시작되기도 전에 유엔 탈퇴를 선언하고 총총히 대회장을 떠났다.

 

미국 이중 플레이 펼쳐

알바니아안은 찬성 76, 반대 35, 기권 17표라는 압도적 다수로 회원국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 중국이 가입을 시도한 지 22년 만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대만의 의석 유지를 위한 미국의 노력도 완전히 좌절되었다. 알바니아안이 가결된 순간 회의장에는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성으로 가득찼고 심지어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알바니아안’이 통과되자 유엔 총회에 참석한 중국의 외교부 부부장 교관화(喬冠華)가 머리를 쳐들고 크게 웃고 있다.(1971.10.25)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우리를 지지해준 대만이 축출되고 적성국인 중국이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우려할 상황이었지만 미국으로서는 굳이 패배랄 것도 없었다. 표결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도 키신저 특사가 북경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미국은 이중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서방 측으로서는 미국이 실리를 좇는 마당에 중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의 친교가 더 절실했다. 이처럼 미국은 이중 플레이를 펼쳐놓고도 막상 자신의 뜻이 먹히지 않자 버클리 상원의원은 “유엔 예산의 3분의 2나 부담하는 미국의 안이 거부된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며 “유엔 종말의 시작”이라고 했고, 실제로 미국은 32%였던 유엔 분담금을 25%로 삭감했다.

중국의 유엔 가입과 대만의 유엔 축출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71년 10월 26일자 1면

 

중국의 유엔 가입이 확정된 그날 밤, 대만 국기는 유엔본부 앞 게양대에서 끌어내려졌다. 중국의 유엔 대표단은 처음 참석한 11월 15일의 총회 연설에서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한국에 관한 유엔의 모든 결의를 무효화시키고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를 해체해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며 기세를 올렸다.

투표가 시작되기 전에 유엔 총회장을 떠나는 대만 대표(1971.10.25)

 

■1945년 유엔 창설 과정

 

유엔 창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1년 8월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발표한 8개항의 ‘대서양헌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유엔(United Nations)’ 명칭은 1942년 1월 1일 26개국 대표가 모여 서명한 ‘연합국 공동선언’에 처음 등장한 후 정식 명칭이 되었다. 유엔헌장 초안은 1944년 8~10월 워싱턴 교외의 덤버턴오크스 박물관 겸 도서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 대표 회의에서 작성되어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된 연합국 전체회의에서 2개월 동안의 심의 끝에 6월 26일 50개국이 조인함으로써 확정되었다. 폴란드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서명해 실제 서명 국가는 51개국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엔이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5년 10월 24일이었다. 10월 24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50개국이 조인(6.26)한 유엔헌장을 비준한 국가 수가 과반인 26개국을 넘긴 날이다. 26번째 비준 국가는 소련이었다.

51개국 대표가 참석한 유엔의 첫 총회는 1946년 1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첫 총회에서는 노르웨이 외무장관 출신의 트뤼그베 리가 초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가운데 이란의 일부 지역을 계속 점령하고 있는 소련, 그리스를 점령하고 있는 영국에 비난이 쏟아졌다. 유엔 본부는 한동안 뉴욕의 대학 캠퍼스나 근교 도시를 전전하다가 록펠러 2세가 뉴욕 맨해튼의 부지를 제공하고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해 1951년 1월 준공되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유엔 창립 총회(194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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