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박흥식의 화신백화점 설립과 한국의 근대 백화점 역사… 화신백화점은 국내 자본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 백화점

↑ 1937년 완공된 화신백화점 건물과 박흥식

 

by 김지지

 

서울역사박물관이 화신백화점에 대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자료를 5월 16일까지 공모한다. 이번 공모전은 7월 2일 개최되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 기획전 화신백화점’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화신백화점은 1932년 설립되어 1987년까지 현재의 종로타워 자리에 위치했다. 화신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백화점이자 종로 상권의 중심이었다. 서울시민뿐 아니라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방문했던 서울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화신백화점의 부침과 한국의 근대백화점 역사를 살펴본다.

 

‘백화점 왕’으로 불리며 한국 최고 부자 소리 들어

박흥식(1903~1994)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 말까지 ‘백화점의 왕’으로 불리며 한국 최고의 부자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급격히 몰락해 오늘날에는 과거의 흔적이 모두 사라져버린 파란만장한 기업가로 기억되고 있다.

박흥식은 평남 용강의 2,000석꾼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15세 때이던 1918년 용강읍내에서 미곡상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그해 쌀값 폭등으로 큰돈을 벌게되자 그 돈으로 1920년 급락한 땅을 대규모로 매입해 대지주가 되었다. 1920년 고향에 차린 인쇄소까지 큰 성공을 거둬 1926년 6월 서울로 진출했다. 종이도매업체 ‘선일지물’로 역시 큰돈을 벌어들인 박흥식이 다음 사업 목표로 잡은 것은 대형 상점이었다.

당시 청계천을 경계로 서울 ‘남촌’에는 일본인이 설립한 히라타, 조지야, 미나카이, 미쓰코시 등의 대형 상점이 각축을 벌이며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촌’에는 조선인의 대형 상점 ‘동아부인상회’와 ‘화신상회’가 일본 상점과 경쟁하고 있었다.

1920년 설립된 동아부인상회는 1925년 최남의 손으로 넘어가 3층으로 증축된 뒤 성황을 이뤘고, 1918년 신태화가 종로 네거리에 설립한 화신상회는 양복부, 포목부, 신구잡화부까지 갖춘 서울에서 제일 큰 금은상회로 유명했다. 그러나 화신상회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경영난에 빠지자 박흥식이 이를 인수해 1931년 9월 15일 주식회사 화신상회로 재탄생시켰다.

신태화가 설립한 화신상회 모습

 

박흥식은 화신상회의 목조 2층 건물을 헐고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콘크리트 3층 건물을 지어 1932년 5월 10일 ‘화신백화점’이라는 새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바로 옆에는 4개월 전인 1932년 1월 영업을 시작한 최남의 4층짜리 동아백화점이 자리잡고 있어 박흥식과 최남의 경쟁은 치열했다.

두 청년 실업가는 모든 사운과 재력을 걸고 혈전을 벌였으나 1932년 7월 16일 박흥식이 동아백화점을 인수하는 것으로 승패가 갈렸다. 이로써 박흥식은 서울의 최대 상권을 거머쥔 유통업계의 큰 손으로 우뚝 섰다. 당시 박흥식이 보여준 경영 수완은 신기에 가까웠다. 경품부 바겐세일, 체인점 설치, 상품권 발행, 주택의 경품 제공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이고 대담한 마케팅 기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탁월한 사업 수완을 펼쳐보였다.

 

화신백화점 서울의 대표적 명물로 각광받아

박흥식은 백화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화신백화점 건물은 서관, 동아백화점 건물은 동관으로 구분해 두 건물을 육교로 이었으나 1935년 1월 27일 저녁 7시 30분쯤 일어난 큰불로 서관 1~3층이 전소되고 동관 3층, 4층이 불에 타는 바람에 4년에 걸친 공든 탑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었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재산 피해가 컸다.

그렇다고 풀이 죽을 박흥식이 아니었다. 그는 “불난 집이 더 비싸게 팔린다”, “불같이 활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큰소리치고는 총독과 담판 끝에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 같은 해 8월 15일 임시로 백화점 영업을 재개했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소방대의 책임을 거론하며 총독을 압박한 결과였다.

대형 건물 두 동을 통째로 태워버린 초유의 화재가 안긴 충격은 컸다. 엉성한 소방 시스템이 도마에 올랐고 이후 소방 행정이 달라졌다. 대화재 뒤 첫 연말이 다가오자 경성소방서는 시내의 모든 극장과 백화점마다 소방관 1명씩을 상주시키며 화재 경계를 하는 특단의 대책까지 실행했다. 화재 신고 전화 ‘119’도 그해에 탄생했다. 경성중앙전화국은 1935년 10월 1일 전화번호 안내번호 ‘114’ 등 10개의 서비스 번호를 제정하면서 119 번호를 도입했다. 119는 1927년 일본의 도쿄와 교토 전화국에서 처음 도입한 번호였다.

박흥식은 1935년 9월 15일 동관을 5층으로 증개축하고, 1937년 11월 11일 서관 자리에 르네상스식 초일류 대형 건물을 지어 재개관함으로써 새로운 부흥기를 열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으로 지어진 서관 건물은 일본인의 어느 백화점보다 규모가 크고 15인승 엘리베이터와 2대의 에스컬레이터까지 갖춰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명물로 각광받았다. 옥상 위 불꽃 모양의 첨탑과 2층, 3층에 걸쳐 있던 빨간색 네온의 꽃 모양 마크는 화신의 상징이 되었다.

1937년 완공한 화신백화점 건물 모습

 

친일 인사였으나 학교 세우고 안창호 도와

박흥식은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1925년 고향에 중등교육 과정인 용강농업학교를 설립하고 이갑, 유동렬 등이 1908년 설립한 서북협성학교(협성실업학교)를 1939년 4월 인수해 1940년 7월 광신상업학교로 명칭을 바꿨다. 이 학교가 서울 회기동에 있다가 신림동으로 장소를 옮긴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다. 광신상고는 1998년 광신정보산업고등학교로 개칭했다가 2020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로 다시 학교 명칭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흥식은 독립운동가 안창호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안창호가 구속되었을 때는 보석금을 대주었고 안창호가 1938년 사망했을 때는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 함께 기업인으로는 가장 많은 100원을 조위금으로 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임전보국단 상무, 총동원연맹 이사, 기계화국방협회 조선본부 이사, 동양척식회사 감사 등 총독부 산하 각종 단체의 직책을 8개나 가진 친일 인사이기도 했다. 1949년 1월 8일 반민특위 제1호로 검거된 것도 이런 친일 행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9년 4월 21일 병보석으로 풀려나고 9월 26일 무죄판결을 받아 반민특위 검찰관과 사회․정당 단체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6·25 전쟁으로 화신백화점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휴전 후인 1955년 11월 화신백화점 건너편 지금의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에 신신백화점을 개장하고 1년 뒤 화신백화점도 복구해 ‘백화점 왕’으로서의 건재를 과시했다. 그때까지도 박흥식은 우리나라 최고 거부였다.

박흥식

 

숱한 좌절과 시련에도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장사꾼

박흥식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또다시 시련을 겪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43일간 옥고를 치르고 5억 9,000만 환의 벌금을 물었다. 그러나 박흥식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손잡고 거창한 사업을 추진했다. 그것이 영과 욕이 교차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당시의 박흥식은 알지 못했다.

박정희 의장의 권유에 따라 흥한화섬(원진레이온 전신)을 설립하고 1966년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인 비스코스(인견사) 공장을 착공한 것이 몰락의 전주곡이었다. 결국 외자 조달 부진과 예상보다 엄청나게 늘어난 공사비로 준공이 예정보다 늦어지고 때마침 불경기가 불어닥친 데다가 은행 대출마저 끊겨 공장은 가동도 못하고 1969년 산업은행으로 넘어갔다.

1966년 경기도 양주군 흥한화섬 도농공장 기공식. 박흥식(우측 두번째)과 박정희 대통령(가장 우측)의 모습이 보인다.

 

1970년대 들어서도 박흥식은 화신전자(1972), 화신소니(1973)를 설립하며 재기를 꿈꿨으나 이번에는 오일쇼크가 앞을 가로막았다. 결국 화신그룹은 1980년 10월 도산하고, 화신백화점(1985)과 박흥식의 가회동 자택(1987)은 남에게 넘어갔다. 1987년 3월에 헐린 화신백화점 자리에는 1999년 33층짜리 초현대식 종로타워가 세워졌다. 이로써 화신의 50년 영욕의 역사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박흥식도 1994년 5월 10일 이미 눈을 감아 세상에 없었다.

박흥식과 화신의 신화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오늘날 박흥식은 숱한 좌절과 시련에도 굽힐 줄 모르는 타고난 장사꾼으로 기억되고 있다. 친일 행적과 더불어 반민특위 1호 검거자라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내 자본에 의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 설립자로 근대적 의미의 서비스 산업에 경영학 개념을 도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종로타워를 짓기 전 화신백화점 모습

 

일제강점기 때 백화점은 미쓰코시, 미나카이, 조지야, 히라타, 화신 5개

일제강점기 때 대표적인 백화점은 미쓰코시(三越), 미나카이(三中井), 조지야(丁字屋), 히라타(平田), 화신 등 5개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건물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두 군데다. 현재 신세계백화점이 사용하고 있는 미쓰코시 건물과 한동안 미도파백화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롯데백화점 영플라자로 영업을 하고 있는 조지야 건물이다. 미나카이는 지금의 명동 밀리오레(2015년 르와지르 호텔로 리모델링) 자리에, 히라타는 지금의 대연각센터 빌딩 자리에 있었다. 화신백화점 건물은 1987년 허물려 지금은 그 자리에 33층짜리 종로타워가 서 있다.

5개 백화점의 출발 연도는 각각 다르다. 조지야는 1921년, 미나카이는 1922년, 히라타는 1926년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는 규모가 큰 잡화점 수준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백화점과는 다르다. 그럼 점에서 일본 건축가 하야시가 설계하고 1930년 10월 24일 개관한 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의 콘크리트 건물 안에 다종다양한 물품을 구비·판매한 미쓰코시 백화점이 근대식 백화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미쓰코시는 1904년 설립된 일본 최초의 백화점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은 1852년 파리에서 문 연 ‘봉 마르셰’다. 미국은 ‘메이시’, 영국은 ‘휘틀리’가 각각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미쓰코시는 1906년 명동의 사보이호텔 자리에 ‘미쓰코시 오복점’(옷감과 의류를 파는 상점)을 개점하면서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미쓰코시 백화점

 

오복점은 미쓰코시가 서울에 설치한 출장소 형태였으나 1929년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으로 승격되고 1930년 10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는 자리에 신관을 개관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백화점의 모습을 갖춘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재탄생했다.

단층 건물이 대부분일 때 부채꼴로 펼쳐진 입면에 화강암으로 현관을 장식한 초대형 르네상스식 건물은 개점 즉시 서울의 명물로 인기를 끌었다. 가장 크게 관심을 끈 것은 휘황찬란한 쇼윈도와 엘리베이터, 옥상정원이었다. 그중에서도 옥상정원은 서울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서울 최고의 연애 명소로 입소문이 났고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국내 근대적 백화점의 효시는 미쓰코시 백화점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높은 건물과 다양한 상품만이 아니었다.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모든 손님을 상냥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로 맞는 여점원들도 백화점의 경쟁력이었다. 시인 김기림은 ‘도시 풍경’이라는 글에서 “최저가로, 아니 때때로는 무료로 얼마든지 제공하는 여점원들의 복숭아빛의 애교… 이것들은 센서블한 도회인의 류동하는 마음에로 향하여 버려진 데파트멘트의 말초신경”이라고 썼다. 그는 또 “층층대를 올라가는 미끈한 여성의 비단양말에 싸인 다리와 높은 에나멜의 구두 뒤축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서 있는, 수신(修身) 교과서를 잊어버린 중등교원도 있다”고 꼬집었다. ‘백화점녀’, ‘데파트 걸’, ‘숍걸’ 등으로 불렸던 여점원들은 단숨에 젊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업이 되었다.

개점 당시 미쓰코시 백화점은 대지 2,410㎡(730평), 연건평 7,600㎡(2,300평)에 종업원이 360명이었다. 일본 본토를 제외하면 한국과 만주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였다. 주요 고객은 서울 속의 ‘작은 도쿄’로 불렸던 명치정(명동)과 본정(충무로)의 일본인들이었지만 차츰 북촌에 거주하는 조선인 부자들도 고객으로 끌어들였다. 미쓰코시 백화점은 광복 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1962년 동방생명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동방생명은 1963년 삼성그룹으로 넘어가 그해 11월 12일 ‘신세계’로 개명했다.

 

상냥한 미소와 낭랑한 목소리의 여점원들도 백화점의 경쟁력

북촌의 조선인을 주요 고객으로 한 종로의 동아백화점과 화신백화점은 1932년 문을 열었다. 1933년 경성 충무로에 6층 규모의 현대식 백화점으로 문을 연 미나카이는 최대 규모의 유통망을 자랑했다. 당시 미나카이는 1905년 대구에 첫 상점을 연 것을 시작으로 진주(1907), 경성(1911), 부산(1917), 평양(1919) 등 12개 점포, 만주와 중국에 6개 점포를 갖고 있던 백화점 왕국이었다. 전성기의 종업원을 모두 합치면 4,000여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백화점 전 재산이 몰수되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조지야 백화점이 근대적 건물을 갖춘 것은 1939년 9월이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건축된 조지야 백화점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중앙백화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54년 11월 미도파백화점으로 개칭되었다. 미도파는 1969년 대농으로 넘어간 후 10여 년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으나 1980년대 들어 롯데와 현대 등 신흥 백화점들이 잇따라 등장하고 신세계도 유통 전문기업으로 공격적인 경영을 펼치면서 업계 1위 자리에서 물러났다. 1998년 모기업 대농까지 공중분해되어 19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2002년 롯데백화점으로 넘어가 지금은 롯데 영플라자로 이용되고 있다.

조지아백화점

 

롯데와 현대는 후발 주자이면서도 신세계백화점과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3대 백화점으로 군림하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1979년 12월 ‘롯데쇼핑센터’라는 이름으로 서울 소공동에서 개점하고 현대백화점은 1985년 12월 본점에 해당하는 압구정점을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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