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벌어진 서방 제국주의의 이집트 침탈사… 운하 개통(1869년)에서 2차중동전(1956년)까지

↑ 수에즈 운하 주변 지도. 운하 왼쪽은 이집트, 가운데는 시나이 반도, 오른쪽은 이스라엘과 요르단이고 그 아래는 사우디아라비아

 

by 김지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해상 교역의 핵심 통로인 이집트 수에즈운하가 3월 23일 파나마 선적 초대형 화물선에 가로막히면서 국제 해상 물류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길이 400m, 폭 59m, 22만t 규모의 이 선박은 중국에서 출발해 네덜란드로 향하는 중이었다. 뱃머리가 한쪽 제방에 박혔고, 선미가 반대쪽 제방에 걸쳐져 폭 약 280m인 운하가 가로막혔다. 이집트 정부는 “화물선이 강풍과 먼지 폭풍 속에서 조향 능력을 잃으며 운하를 가로막았다”고 밝혔다. 당초 하루 이틀 정도면 해당 선박을 예인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왔지만 예인 작업이 쉽지 않아 운항 재개까지 수주일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수에즈운하에 대해 알아본다.

 

1869년 개통으로 대서양-인도양, 동양-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 무너져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 건설은 유럽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보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토목 기술상의 문제로 단념해야 했고, 의욕을 보였던 나폴레옹마저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손을 떼야 했다.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나폴레옹은 대규모 군대를 끌고가 1798년 7월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달 뒤 나일강 하구에서 영국 넬슨 제독의 함대에 격파당해 이집트에 고립되었다. 바다에서는 나폴레옹이 넬슨에게 패했지만, 육지에서는 여전히 나폴레옹이 강해 영국군은 함부로 상륙하지 못했다.

영국과의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지자, 나폴레옹은 본격적인 탐사를 시작했다. 목적지는 수에즈,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지협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떠날 때 운하를 염두에 두고 대규모 학자까지 대동한 터였다. 그는 고대에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력한 해군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을 이기려면 이곳에 다시 운하를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나설 때 굳이 160여명의 대규모 학자들을 대동한 것은 운하 건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학자 중에는 조제프 푸리에 교수도 있었다. 그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는 ‘푸리에 변환’을 만든 그는 최고의 수학자였다. 푸리에는 이집트에서 각종 발굴과 조사 책임을 맡았다. 학자들은 마침내 고대 운하의 흔적을 발견했다. 곧 지도를 작성하고 운하의 재건 가능성을 검토했다. 지중해와 홍해의 해수면 차이가 심하다는 보고도 있었지만, 푸리에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다. 그들의 탐사에 따르면 홍해와 지중해의 수위 차는 25㎝에 불과했다.

하지만 영국군에 둘러싸인 나폴레옹은 프랑스 본국의 혼란 때문에 더는 운하에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위기를 느낀 나폴레옹은 1799년 푸리에와 군대를 남겨둔 채 홀로 이집트를 탈출해 파리에서 집권에 성공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나중에 몰락하면서 수에즈 운하 계획도 잊혀졌다.

그러다가 1832년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이집트에 부임하러 가던 중 방역 조치로 배 안에 탑승한 채 격리되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려고 읽은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나폴레옹의 운하 기록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사상 최초로 동·서 바다를 잇는다는 자부심도 컸지만, 운하가 개통되면 그의 조국 프랑스가 막강 해운 대국인 영국이 대서양에서 누리는 절대 우위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도 운하 공사를 서둘렀다. 자금도 모았다. 그리고 1854년 이집트 왕에게서 운하 공사권과 조차권을 따내 ‘수에즈 운하 만국회사’를 설립했다. 뒤이어 주식을 프랑스와 이집트 왕 몫으로 나누고, 개통일로부터 99년간 독점 운영하기로 이집트와 계약을 체결했다.

페르디낭 드 레셉스

 

공사 구간은 지중해의 항구도시 포트사이드에서 시작해 팀사호와 그레이트 비터호를 관통한 뒤 홍해의 수에즈만에 이르는 총연장 116㎞였다. 1859년 4월 시작한 공사는 150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고 그들 중 수천 명이 콜레라 등으로 목숨을 잃은 끝에 1869년 11월 17일 개통되었다. 이로써 억겁의 세월 동안 대서양과 인도양, 동양과 서양을 가로막았던 단절의 벽도 무너졌다. 운하 개통 후 영국 런던에서 인도에 이르는 뱃길은 1만 7,300㎞에서 1만 138㎞로, 7,000㎞ 이상이나 단축되었다.

레셉스는 수에즈 운하 개통의 공로를 인정받아 1873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1884년 아카데미 프랑세즈(프랑스 한림원)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말년은 좋지 않았다. 파나마 운하 건설에 나섰다가 경영 부실로 파산해 잔뜩 빚을 졌고, 이로 인해 정신착란을 얻어 고생하다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수에즈운하 국유화’ 선언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금자탑

프랑스가 운하를 개통하자 영국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영국은 1875년 사치로 빚에 시달리던 이집트 왕 이스마일 파샤로부터 주식 전량을 사들여 이집트·프랑스가 공동으로 갖고 있던 운하 소유권 중 이집트 몫을 손에 쥐었다. 1882년에는 운하 보호를 구실로 군대를 운하 양안에 주둔시켜 운하의 지배자가 된 뒤 이집트를 사실상 식민지화했다. 1차대전이 시작된 1914년, 영국은 이집트를 완전한 식민지로 병합하려 했으나 이집트인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자 영국의 보호령으로 편입시켰다. 이집트는 1922년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했으나 영국이 갖고 있던 수에즈운하 주류권(駐留權) 등 많은 특권은 손을 대지 못했다.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와 무함마드 나기브를 중심으로 한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2년 후 나세르는 나기브를 축출한 후 권력을 잡아 1956년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해 7월 26일, 중동을 지배해온 서구 식민주의의 종말을 예고하는 폭탄선언을 발표했다. 나세르가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의 한 광장에 운집한 5만여 군중 앞에서 “수에즈운하는 이집트의 희생으로 세워진 것인데도 이제까지 외국의 부당한 지배로 착취를 당해왔다”며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같은 시각, 수십명의 이집트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수에즈운하 관리사무소 부근에서 라디오방송으로 중계되고 있는 나세르의 연설을 들으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연설 도중 나세르가 수에즈운하를 건설한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이름을 거명하자 그들은 그것을 신호탄 삼아 수에즈운하 사무소를 급습, 운하를 점령했다.

당시 수에즈운하의 소유·관리권은 프랑스와 영국이 갖고 있었다. 조차권도 12년이나 남아 있었다. 하지만 평소 서구의 자본 수탈을 고깝게 생각해오던 나세르는 운하를 되찾겠다며 수개월 전부터 운하 국유화를 준비했다. 그러던 중 나세르의 거사 시기를 앞당기도록 부추기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과 영국이 이집트에 아스완 하이댐 건설을 재정 지원하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국유화 선언 1주일 전인 7월 19일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스완 하이댐을 통해 산업 전력을 확보하고 또 관개용수를 이용해 경작지를 25%가량 늘릴 계획을 갖고 있던 나세르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된 것에 크게 실망하고 어차피 한번은 치를 진통이라는 마음으로 국유화를 결심했다.

미국과 영국이 자금 지원을 거부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나세르가 집단안보체제인 ‘바그다드조약기구’ 가입을 거부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아 체코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반서방 정책을 취해 자칫 지원금을 무기 구입으로 빼돌릴지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수에즈 운하 위성사진(과)과 지도

 

‘국유화 선언’, 2차중동전(수에즈전쟁)으로 확대돼

이유가 무엇이든 아랍 전역으로 방송된 ‘국유화 선언’은, 장기간에 걸친 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던 아랍 민중을 고무했다. 국유화 선언은 1951년 이란의 모사데크 총리가 추진하다 실패한 ‘석유 국유화’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사건이자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금자탑으로 평가되었다.

반면 오랫동안 운하의 이권을 양분해온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충격이었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우리는 사악한 돼지가 우리의 교통망을 가로막게 할 수는 없다”는 반응을 보였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와 튀니지를 잃고 모로코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알제리 반란을 부추기는 나세르의 붕괴를 원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무력을 행사하기로 뜻을 모은 뒤 이스라엘에 동참 의사를 물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인도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티란해협을 이집트가 봉쇄하고 있어 사실상 이집트와 준전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며 “전쟁을 일으키면 반드시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리아·요르단과 군사외교 동맹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스라엘은 자칫 포위당하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 위해 이집트에 대한 선제공격을 결정했다.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3국은 파리에서 비밀리에 회동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선제공격하면 프랑스와 영국이 뒤따라 참전하기로 합의했다.

1956년 10월 29일 밤, 이스라엘군이 이집트 영내 시나이반도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중동전 이른바 수에즈 전쟁이 개막되었다. 이튿날, 영국과 프랑스는 사전 각본대로 수에즈운하의 안전운행 확보를 이유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군에 24시간 내 운하에서 각각 16㎞씩 철수하라고 통첩했다.

 

100여 년에 걸친 영국·프랑스의 중동 지역 지배 시대도 마침표 찍어

이집트가 거부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24시간의 철수 시한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31일, 수에즈운하 입구에 있는 포트사이드 항구 등 운하 연변의 도시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세르는 50척이 넘는 화물선 밑창에 구멍을 뚫어 운하 입구에 침몰시키는 운하 봉쇄로 제국주의에 맞섰다. 소련은 “무력 행사도 불사하겠다”며 3국의 침공 중단을 요구했다. 아이젠하워는 “소련이 그들에게 폭탄을 투하해도 그대로 방치할 것”이라며 분노했다.

영국·프랑스군의 포드 사이드 공격으로 수에즈 운하 옆 기름 탱크에서 연기가 솓아오르고 있다. (1956.11.5)

 

11월 2일 유엔이 긴급 특별총회를 열어 미국이 제안한 수에즈운하 정전 결의안을 가결하고 11월 5일 유엔 중동평화군 제1진을 이집트로 파견했다. 미국이 주도한 정전 결의는 냉전 기간 중 미국이 동맹들에 반대표를 던진 유일한 사례였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1월 5일과 6일 각각 정전안을 수락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정전안을 거부하며 포트사이드 등을 점령했다. 하지만 두 나라도 결국에는 국제 여론의 압력에 밀려 11월 7일 정전안을 수락했다.

1주일밖에 안되는 전투에서 침략 3국의 희생자는 200명이 채 안 되었지만 이집트에서는 거의 3,000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났다. 12월 22일 영국·프랑스 양군이 철군을 완료함으로써 전쟁은 47일 만에 종결되었다. 100여 년에 걸친 영국·프랑스의 중동 지역 지배 시대도 종전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아랍 세계는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서 이뤄낸 아랍 민족주의의 승리에 열광했고, 나세르는 “서방 세계에 도전한 첫 아랍인”,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수에즈 전쟁이 끝나자, 1899년 포드 사이드에 세웠던 레셉스 동상을 1956년 12월 이집트 시민들이 떼어내고 있다.

 

이집트는 2014년 8월 제2 수에즈 운하를 착공해 2015년 8월 6일 개통했다. 핵심 도시 이스마일리아를 중심으로 한 72㎞ 구간에 기존의 수에즈 운하와 평행하게 건설했다. 그 결과 수에즈 제1·2 운하 전체 폭은 기존 160~200m에서 317m로 넓어지고, 깊이도 14.5m에서 24m로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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