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괴벨스
by 김지지
최근 수개월 사이, 나치 독일의 선동가 괴벨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오르내린다. 지난 3월, 오세훈 국민의힘 서울시장 후보는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자신을 향해 “진실을 말하지 않는 자, MB와 똑 닮았다”고 하자 박 후보를 향해 “괴벨스 같다”고 맞받아쳤다. 같은달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괴벨스가 ‘거짓말도 백 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 ‘99%의 거짓에 1%의 진실을 섞으면 더 효과적’이라고 했던 ‘선동의 법칙’을 문재인 정권이 적극 추종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2020년 11월에는 한 검사가 문재인 정권을 향해 “나치 괴벨스가 떠오른다”라고 반발하고, 문재인 대통령의 경희대 후배는 같은 학교 출신인 문 대통령과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을 향해 “당신과 당신의 괴벨스들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괴벨스 이름은 미국의 대선 때도 등장했다. 미국의 존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0년 9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당신을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이는데 어떻게 대응하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트럼프는 괴벨스 같은 존재다. 유권자에게 계속 거짓말을 반복해 이를 상식처럼 여기게 만들었다”고 반박했다. 이런 주장들의 사실 여부를 떠나 괴벨스가 어떤 인물이기에 이렇게 한미 양국에서 이름이 회자되는 것일까. 괴벨스에 대해 알아본다.

사회주의·공산주의에 경도되고 광적인 반유대주의로 기울어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천부적인 달변과 본능적인 선전 감각을 타고난 ‘언어의 마술사’이자 ‘여론 조작의 대가’였다. 무엇보다 1차대전 후 실의에 빠진 독일 민족의 구원자로 히틀러를 신격화함으로써 독일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전 세계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 죽음의 전령사였다.
괴벨스는 독일 라인주의 소도시 라이트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대퇴부에 앓은 골수염으로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굽고 성장이 지체되어 어려서부터 동정 어린 시선이나 놀림을 받으며 자랐다. 그 과정에서 생긴 열등감이 그 시절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고교 시절 발발한 1차대전 때도 다른 친구들은 다 군에 자원입대했으나 그만은 굽은 다리 때문에 입대하고 싶어도 입대할 수 없는 현역 불가 판정을 받아 또다시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친구들이 전선에 나가 있던 1917년, 본(Bonn)대에 입학,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계속된 가난으로 때로는 굶기도 했지만 장학금, 과외수입, 대출금으로 학업을 마쳤다.

그가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8년 독일이 패전했다. 혼란한 틈을 타 공산주의자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극우 세력은 퇴역군인들로 조직한 자유군단(의용군)으로 폭동에 맞섰다. 독일에 과중한 배상금을 강요한 ‘베르사유조약’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 실업자들도 독일 전역에 넘쳐났다. 괴벨스 역시 직업을 구하지 못해 다락방에 틀어박혀 시, 자전적 소설, 희곡 등을 썼다. 그러면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증오했다. 어렵게 드레스덴 은행에 취업했으나 9개월 만에 해고되었고 몇몇 신문사에서는 퇴짜를 맞는 등 뭐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지원했던 신문사 대부분이 유대인 소유였다.
괴벨스는 재능에 비해 과소평가되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혐오하게 되었고 광적인 반유대주의로 기울었다. 그전까지 그는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다. 대학 시절 존경한 교수도 유대인이었고 한때의 약혼녀도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이 그러했듯 그 역시 패전으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휩싸이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괴벨스는 본대, 뷔르츠부르크대, 프라이부르크대, 뮌헨대를 거쳐 1920년 옮긴 하이델베르크대에서 1921년 11월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는 괴벨스의 자존심을 크게 만족시켜 주었고 이후 괴벨스는 서명을 할 때 반드시 ‘괴벨스 박사’라고 적었다.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의 마음 흔들어
괴벨스는 1923년 11월 히틀러의 뮌헨 폭동 소식을 듣고 히틀러를 추앙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반역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절망하고 있던 많은 독일인은 혜성처럼 나타난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괴벨스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소규모 우익정당인 독일민족자유당이 발행하는 ‘민족의 자유’지 편집원으로 들어가 1924년 10월부터 수개월 동안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히틀러는 1924년 12월 풀려나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 재건에 나섰다. 괴벨스는 1925년 2월 나치당에 입당했다. 당시 나치당은 이념적으로 ‘잡탕 정당’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라는 당명부터가 ‘국가’라는 우익적 요소와 ‘사회주의·노동자’라는 좌익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괴벨스는 스스로를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해온 터라 좌익적 색채가 강했다. 반면 히틀러는 전통적인 보수주의 세력과 자본가 계층에 접근했다. 괴벨스는 이런 히틀러를 비판하곤 했으나 기대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히틀러가 이런 괴벨스에게 손을 내밀어 두 사람은 1925년 7월 처음 만났다. 괴벨스는 당시 심정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히틀러는 괴벨스를 호감을 갖고 지켜보았다. 결국 괴벨스는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했다.
히틀러는 이런 괴벨스를 1926년 11월 베를린의 나치당 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베를린의 정치 주도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쥐고 있었다. 괴벨스는 준군사조직인 나치돌격대를 동원하고 시위를 벌여 공산주의자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곤봉과 몽둥이가 난무하고, 피가 튀고,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때의 투쟁에서 나치당은 패배했다. 괴벨스는 나치가 베를린에선 약자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당분간 내부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선전·선동 요원 양성에 치중했다. 히틀러는 괴벨스의 충성심과 복종심과 선전·선동 능력을 인정해 1928년 나치당의 선전 책임자로 임명했다.

나치당은 1924년 5월 총선에서 6.5%의 득표로 32석의 의석을 획득해 기세등등했으나 1928년 5월 총선에서는 득표율 2.6%에 의석수 12석으로 떨어져 실망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지지 덕분에 괴벨스는 국회로 진출하는데 성공, 면책특권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를 공격하거나 노골적으로 공화국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소수당에 머물러있던 히틀러의 나치당에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은 1929년 말 전 세계를 강타한 대공황과 경제난이었다. 나치당은 1930년 9월 총선에서 18.3%의 득표율로 107석을 얻어 일약 제2당으로 부상했다. 괴벨스는 1931년 이혼녀인 마그다와 결혼해 1945년 죽는 날까지 1남 5녀를 낳았다. 아내가 데리고 온 아들도 함께 살았다.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마침내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내각 안에 국민계몽선전부를 새로 만들어 3월 14일 괴벨스를 장관 겸 제3제국 문화원 원장으로 임명했다. 괴벨스는 취임 일성으로 “선전부는 국민 정신의 함양에 관한 전권을 갖는다”고 공언하면서 “나에게 단 하나의 문장만 주면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호언했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우상으로 만들기 위해 미디어를 이용한 선전·선동과 조작된 여론으로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낙인찍기’ 수법과 ‘시체팔이 투쟁’에 능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 희생자들이 나오면 그들을 ‘순교자’로 치켜세우고,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 폭력을 맹비난했다.
괴벨스에게 시급한 것은 언론장악이었다. 먼저 좌파 언론과 유대계 언론사들을 폐쇄했다. 3개이던 통신사는 국가 소유의 통신사로 통합했다. 편집인법을 제정, 그때까지 신문·잡지의 발행인이 지던 책임을 편집인과 나누도록 했다. 이를 통해 국가가 편집권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다. 괴벨스는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계에도 손을 뻗쳤다. 이른바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수만 권의 책들은 불에 태워 없앴다. 6000여 점의 미술 작품들도 퇴폐 미술작품이라는 이유로 공공미술관에서 철거하거나 몰수해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특히 괴벨스가 동물적인 후각을 발동한 것은 시대의 총아 라디오였다. 1934~1935년 라디오 보급을 위해 국가보조금을 지급한 덕에 독일 국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라디오를 구매했다. 독일인들은 라디오를 가리켜 ‘괴벨스의 입’이라고 불렀다. 영화도 괴벨스의 주요 관심 분야였다. 뉘른베르크 나치 전당대회를 소재로 한 ‘의지의 승리’(1934)와 베를린 올림픽 기념 영화 ‘올림피아’(1938) 제작을 적극 지원해 대중이 부지불식 간에 전체주의의 늪에 빠져들도록 했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선전 책임자의 역할이 필요치 않아 권력 핵심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졌으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하고 전세가 역전되면서 다시 ‘선전의 대가’로 부활했다. 히틀러의 침략 전쟁을 돕기 위해 괴벨스는 ‘가짜 뉴스’ 생산도 서슴지 않았다. 전쟁 말기에는 자신이 직접 돌아다니며 신문과 라디오를 통한 선전 활동을 강화했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 벙커와 요새로 숨어든 뒤에도 그만은 대중 앞에 끊임없이 나서는 용기를 보였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애인 브라운과 함께 자살하기 전 괴벨스를 제국의 총리로 임명해 마지막으로 그의 충성심에 보답했으나 괴벨스는 5월 1일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독살한 후 자신도 독약 앰풀을 깨물어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영원한 심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나치 친위대원들은 괴벨스 부부의 시신 위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그렇게 괴벨의 흔적은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