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제주 4·3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비극적 사건… 직접적 원인은 좌익의 무장 투쟁과 군경의 과잉 진압

↑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힌 귀순 제주도민들이 심문을 기다리고 있다.

 

by 김지지

 

제주 4·3사건 당시 감옥살이한 사람들이 70여 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지법이 제주 4·3사건 당시 국방경비법 위반 등 혐의로 수감되었던 335명에 대한 재심 선고 재판에서 “공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다”며 3월 16일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1만명 이상의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이유를 알아본다.

 

“배경 복잡하고 원인 다양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4·3사건 위원회)

제주 4·3 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은 비극적 사건이다. 오랫동안 제주도 주민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던 4·3사건의 실체가 정부 차원에서 규명된 것은 2000년 1월 ‘제주 4·3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였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수년 간 조사 끝에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있고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아마추어들의 작품”이라고 평가절하는 목소리도 있다.

위원회는 “4·3 사건은 배경이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서 결정적 원인으로 1947년의 3·1절 발포 사건을 꼽았다. 발포 사건 후 제주 사회가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고 그로부터 1년 뒤 4·3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3·1절 발포사건은 1947년 3월 1일 약 3만 명의 군중이 제주읍 관덕정 부근에서 3·1절 기념식을 열고 있을 때 한 기마순경이 실수로 6살 꼬마를 말발굽으로 치어 중상을 입힌 것에 대해, 군중이 경찰서를 찾아가 돌을 던지며 항의하다가 경찰이 쏜 총에 6명이 죽고 8명이 다친 사건이다. 숨진 사람들이 3·1절 집회·시위를 주도한 좌익이었는지 무고한 양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제주읍내의 기마경찰과 헌병

 

이유가 무엇이든 발포 사건 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사건을 호기로 삼아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을 전개했다. 3월 10일 총파업을 주도하고 파괴, 습격, 테러, 시위, 동맹휴업 등 갖가지 방법으로 투쟁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미 군정은 총파업의 이유가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이라고 파악하긴 했으나 ‘경찰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경 대응했다.

곧 도지사 등 고위 행정직은 전원 외지 사람들로 교체하고 육지에서 경찰을 급파했다. 여기에 민간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도 대거 제주로 내려가 파업 주모자 검거를 지원했다. 결국 검속 한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이듬해 ‘4·3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2,50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처럼 미 군정이 강경 일변도로 대응함으로써 주민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가운데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해 민심을 더욱 격앙시켰다.

 

무장대를 따르면 폭도로 몰려 죽었고, 경찰을 도와주면 반역자로 몰려 죽어

제주 4·3 사건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려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대 500여 명과 1,000여 명의 동조자가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도 내 12개 파출소, 서북청년단(서청) 등 우익단체 숙소, 행정기관 등을 급습하는 무장폭동을 일으키면서 시작되었다. 경찰·서청의 탄압 중지, 남한만의 단독선거·단독정부(단선․단정) 구성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무장대의 봉기로 이날 하루에만 10~20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미 군정은 육지에서 경찰과 서청 단원을 증파해 사태 확산을 막으려 했으나 쉽게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군부대인 국방경비대를 출동시켜 진압작전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 주둔 향토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이 무장대 측 김달삼과 ‘4·28 협상’을 통해 72시간 안의 전투 중지, 무장해제, 하산한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 등 3가지 조건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우익청년단이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키고 김익렬 연대장이 전격 해임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김익렬이 남로당이 군에 침투시킨 프락치들의 사주를 받았고, ‘4·28 협상’은 김익렬의 회고록에 근거한 것으로 토벌 과정에서 노획한 남로당 무장대의 투쟁 보고서와 미국·북한 자료를 보면 사실과 전혀 다르다면서 그런 합의는 애초에 없었다는 반론이다.

김달삼(왼쪽)과 김익렬

 

여기에 전국적으로 치러진 1948년의 5·10 총선거가 제주도 내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고, 5월 20일 경비대원 40여 명이 탈영해 무장대 측에 가담하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게 피살당하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다행히 한동안은 소강 국면 상태를 유지했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남로당 지도부가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북한의 ‘해주대회’에 참가하는 동안 조직을 재편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군경 토벌대는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슨하게 진압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강 상태는 잠시뿐이었다. 8월과 9월 남북에 독자적인 정권이 세워지면서 제주 사태는 단순한 지역 문제를 뛰어넘어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4·3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1948년 5월 5일 제주를 방문한 윌리엄 딘 주한미군정장관이 제임스 맨스필드 59군정중대 중령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으로 유해진 제주도지사, 송호성 국방경비대 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9연대 연대장의 모습이 보인다. 맨스필드 중령 뒤에 가려진 인물은 안재홍 민정장관이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해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했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또 한 번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더구나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 통행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11월 17일 정부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4·3 사건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때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으로 4·3 사건 전체 희생자의 80%가 죽임을 당했다.

다수 양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 무장대의 강요를 따르면 나중에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폭도로 몰려 죽었고, 경찰을 도와주면 무장대에게 반역자로 몰려 죽었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주민 전체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산자락에서 해안가 마을까지 뒤덮으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 많은 주민이 입산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1948년 5월 15일 촬영)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만 내려

정부는 1949년 3월 기존의 진압작전에 선무작전을 병용했다. 유재흥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이 “한라산에 피신한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하자 공포에 떨던 주민들이 하나둘 하산했다. 미뤄진 재선거도 1949년 5월 10일 성공리에 치러지고 5월 15일 토벌을 주도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도 해체되었다. 무장대 총책 이덕구까지 1949년 6월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도 사실상 궤멸되었다. 하지만 1년 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무장대의 공세가 미미해지자 정부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을 전면 해제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월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 4·3 사건은 7년 7개월 만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미 군정이 배포한 귀순 촉구 전단지 (출처 제주 4.3공원)

 

사태가 이렇게까지 장기화하고 수많은 양민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좌익의 무장투쟁과 군경의 과잉진압이었다. 양민의 죽음을 담보로 강경 투쟁만을 고수한 좌익 지도부의 무모함과 모험주의가 없었다면 1만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이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1차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군경의 과잉진압도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좌익과 양민이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무장대가 밤낮으로 군경을 공격해오는 상황에서 크게는 막 태동한 대한민국 수호를 위해 작게는 보복이 보복을 낳는 피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방법이 과잉진압밖에 없었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배타적이던 제주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사태가 커진 측면도 있다. 해방과 함께 일본․중국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주민수가 급증했는데 이들 중 좌익계가 많았던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남로당은 김달삼을 제주도지구당 총책으로 앉히고 학도병 출신 이덕구를 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삼아 각종 좌익 외곽단체를 조직했다.

이처럼 도내가 적화되고 그들의 암약으로 도내 행정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미 군정은 경찰·서청단원들을 보내 치안을 담당하게 했다. 그러나 말도 통하지 않는 외지인들이 도민을 가혹하게 대하고 행정기관도 방관하는 사이 도민의 반감은 커치고 마찰은 빈발했다.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좌익이 선전 선동을 강화해 미 군정에 대항하도록 부추기면서 비극이 잉태했다.

 

“무장봉기일을 추념일로 정한 것은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정당성 부여한 것”

4·3 사건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오랫동안 파악되지 않았다. 3만~8만 명의 양민이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다가 2003년 ‘4·3 사건 진상규명위’의 희생자 신고접수에 따라 1만 4,000여 명(사망 1만 700여 명, 행방불명 3,100여 명, 후유장애 14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집계되었다.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가 발표된 후 2006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 4·3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3사건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4·3 희생자 추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그런데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길언은 이에 대해 다른 목소리를 낸다. 4·3사건 당시 9살이던 현길언은 식구들과 피란을 가고, 할머니와 삼촌 등 일가친척들이 좌우 양쪽으로부터 화를 입은 당사자로 장편소설 ‘한라산’을 비롯, 4·3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4·3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앞장서온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목소리에는 진정성이 있다.

그는 “4·3사건은 남로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제주도 일선 지서 12곳을 습격한 무장봉기로 시작된 사건인데도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무장봉기일인 4월 3일을 추념일로 정하고 대통령이 추념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남로당의 무장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크다”면서 “4·3사건이 마무리된 1954년 9월 21일을 추도일로 잡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고 대통령의 추념행사 참석과 국가기념일 지정을 문제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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