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신라·백제·고구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는 생존 방식… 현재 관점에서 과거 재단하려는 태도는 소설가나 할 일

↑ 최치원 영정(왼쪽)과 쌍계사 진감선사탑비

 

신라 말기의 최치원은 뼛속 깊이 사대주의자

다음 문장을 곰곰이 새겨보자.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 때(서기 648년) 당 태종께서 역사서를 내려주셨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미개한 나라에서 문명국이 됐다. 김춘추는 우리나라를 문명에 접하게 하셨고, 그의 8대 손인 낭혜화상(801~888년)께서는 중국 유학 때 배운 것으로 우리나라를 교화시켜 이상적인 나라로 변화시켰다.”

이 정도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중국 사람인지 신라 사람인지 헷갈릴 수 있을 것이다. 김춘추를 들먹이면서 ‘우리나라’ 운운하지만 않았다면… 이 글을 쓴 주인공은 누구일까? 신라 말기의 천재로 알려진 최치원이고 그가 쓴 ‘성주사 낭혜화상 탑비’에 실린 글이다. 신라 말기의 손꼽히는 고승 낭혜화상 무염의 사망 2년 뒤인 서기 890년 말에 작성했다.

최치원 하면 대부분 ‘비운의 천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6두품의 한계 속에서 좌절한 대표적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신라의 개혁을 위해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인 ‘시무 10 여 개 조’를 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자 세상을 등진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실에서 실패한 지식인에 대한 동정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최치원도 그런 경우다. 하지만 그가 남긴 글을 찬찬히 살핀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지 모른다. 왜? 그는 뼛속 깊이 ‘사대주의자’였으니까… 그는 ‘성스러운 당나라’라는 표현도 썼다.(쌍계사 진감선사탑비. 886~887년 즈음 작성)

낭혜화상 탑비나 진감선사 탑비나 모두 신라에 세운 탑비였다. 당나라 사람이 읽으라고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문장을 썼다. 그렇다면 그는 당나라 사람을 상대로 한 문장에서는 어떤 ‘존경의 마음’을 담은 표현을 썼을까?

 

신라든 발해든 백제든 사대주의는 마찬가지

서기 897년, 발해는 왕자 대봉예를 당나라에 보낸다. 대봉예는 이 자리에서 ‘당나라가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발해가 신라보다 상석에 앉도록 해 달라’는 국서를 올렸다. ‘발해는 당나라에 이은 2등 국가, 신라는 3등 국가’임을 당나라가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당나라는 ‘사신들의 위치는 현재의 국력이 아니라, 그간의 관례대로 하는 것’이라며 발해의 요청을 거절한다.

이에 대해 신라 효공왕은 감사의 글인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올렸는데, 그 글 작성자가 최치원이었다. ‘사불허북국거상표’를 번역하자면 ‘북국(=발해)이 신라보다 상석에 앉지 못하도록 불허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표문’이라는 뜻이다. 표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니, 이 글은 신라가 당의 신하국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작성 시기는 서기 898년 즈음 추정.)

그는 이 표문에서 발해 욕을 ‘한 바가지’씩 하면서 ‘신라는 당나라에 이은 2등 국가, 발해는 도둑떼가 세운 저질 국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 표문 외에도, 최치원이 당나라에 올린 글을 보면 그의 한결같은 사대주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동일하게 중시되는 ‘민족정기’ 운운하는 역사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최치원은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당에 착 달라붙은 사대주의자에 반민족주의자였으니…. 한데 이런 사대정신이 최치원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하긴, 발해 역시 최치원과 ‘똑 같은 논리’를 구사했으니, 발해 역시 당에 사대적 태도를 보인 것은 분명하다.

눈을 돌려 백제를 보자. 한국사 시간에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서기 472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개로왕이 중국 북쪽을 지배하는 북위 황제에게 고구려를 침공해줄 것을 요청한 글이다. 필자는 고교 국사 시간 때, 개로왕의 국서에 대해 배우면서 백제의 유교 경전에 대한 높은 이해도 등 문화 역량과, 외교술 운운이라는 식으로 배웠다. 한데 개로왕의 국서가 어찌 시작하는지 혹 아시는 분…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북위의 신하인 저는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길을 막고 있어서, 비록 대대로 북위의 교화를 받았으나, 신하된 자의 도리를 다할 수 없었습니다. 멀리 북위 궁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끝이 없으나, 북쪽의 찬바람(=고구려)으로 말미암아 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천명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존경의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고구려를 침공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도 이렇게까지 글을 쓴다는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이다. 그러니 개로왕도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사대주의자에 반민족주의자이다.

 

고구려도 중국의 패권 국가와 ‘맞짱’ 뜰 수 없다는 사실 알고 있어

그럼 고구려는 다를까? 고구려는 한민족사가 낳은 최고의 명장 을지문덕이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쳤고, 양만춘 장군이 이끄는 안시성의 민과 군이 합심해서 당 태종의 침입도 물리쳤던 나라이니… 한데 양만춘이 안시성 싸움을 이끌었다는 것은 삼국사기나 당시의 중국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수나라의 고구려 1차 침입(서기 598년)이 장마와 폭풍우, 그리고 전염병으로 인한 자진 철군으로 실패한 직후, 고구려 영양왕은 수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황제에게 자신의 불충을 용서해달라고 빈 뒤 자신을 ‘요동의 분토신’이라고 자칭했다. ‘똥덩어리나 다름없는 요동 땅의 신하’라는 뜻이다.

살수대첩(612년)의 승리를 우리는 그렇게도 되뇌지만, 철군하는 수나라 군대를 고구려 군이 수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가 쫓았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전술적 차원이라고 옹호할 수도 있겠지만,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는 여러 차례 수나라에 항복 문서도 보냈고…

고구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중국의 패권 국가와 ‘맞짱’을 뜰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 최전성기(서기 4세기 말~6세기 초반)에도 고구려는 중국의 북쪽만을 장악한 반쪽짜리 왕조(=북위)에 수십 차례 조공을 보냈던 것이고… 그렇다면 고구려 역시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사대주의에 찌든 ‘토착 짱깨’가 우글거렸던 셈이다.

김유신이 고구려를 정벌하러 떠나는 군사들이 두려움에 동요하는 빛을 보이자 “대국인 당나라가 우리와 함께 하는데 두려워할 것이 뭐가 있는가”라고 이야기한 것이나(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및 김유신열전), 문무왕이 신라를 침략한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여러 차례 “저의 죽을 죄를 용서하소서”라며 전쟁 중단을 호소하는 대목(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을 보노라면 차라리 책을 덮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한데 찬찬히 생각해보자. 책을 덮고 싶고, 수치심을 느끼는 귀하의 시각은 ‘철저하게 귀하의 현재적 입장’만이 반영된 것은 아닌지.

 

과거 관점으로 현재 읽을 수 없듯, 현재 관점에서도 과거 읽을 수 없어

천박한 예 하나만 들자. 무인도에 귀하가 표류했다. 그 곳에는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마이크 타이슨, 김두한처럼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무법천지로 다스린다. 그냥 주먹 센 놈이 제일이다. 그곳에서 귀하는 “인권”이니 “사회 정의”니 운운하면서 권력자에게 저항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곳의 ‘질서’에 순응해서 살아남은 귀하에게 누군가가 “힘 있는 놈에게 붙어먹은 비겁하고 굴종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할 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국제법 운운하는 것은 현대의 일일 뿐이다. 근대 이전의 ‘사대’는 그런 차원이었다.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 간의 ‘외교’는 사대로 결정될 뿐이었다. 그것을 두고, 구시렁거리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사실 관계는 아예 무시한 채, ‘현재적 관점’에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태도에는 구역질마저 난다.

대학 신입생이던 18 세 무렵, 가슴 뛰며 새겼던 E. H. 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구절이 나이를 먹을수록 ‘쉰 내 나는 클리쉐’로만 들렸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므로, 현재적 관점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태도는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할 일이다. 역사가 과학으로 성립하려면, 먼저 팩트부터 명확히 살펴야 하는 게 아닌가? 역으로, 과거의 관점에서 현재를 읽으려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과거의 관점으로 현재를 읽을 수 없듯,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읽을 수도 없다. 과거가 현재의 우리에게 낯 선 나라이듯, 현재 역시 과거에게는 낯 선 나라일 뿐이다. “민족사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키겠다”면서 한국사 교육 강화를 이야기한 ‘폐주’ 박근혜나, “올바른 역사 이해를 통해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문재인 대통령이나 ‘같은 동전의 다른 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추신>

중국 통일 왕조의 동북아시아 패권 질서가 명확히 된 것은 아무래도 당 이후로 봐야할 것이다. 그 이후 한반도 왕조의 운명은 동일했다. 사대는 국제 외교에서 흔들릴 수 없는 법이요, 질서였다. 한반도 왕조는 이를 철저하게 따르면서 명을 보존했고. 그것을 깨려면 중국 통일 왕조와의 싸움 밖에는 없었다.

그 질서가 깨진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입 이후였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이 패전하면서, 중국 통일 왕조를 통해 유지되던 동북아 패권 질서가 무너졌으니까.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독립문이 1897년에 선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사대보다 혹독한 강점이었으니…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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