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⑫] ‘서독 녹색당의 화신’ 페트라 켈리와 24살 연상 게르트 바스티안의 사랑, 그리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죽음

↑ 페트라 켈리(왼쪽)와 게르트 바스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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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황망한 죽음

1992년 10월 19일 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서독 본(Bonn city) 외곽의 한 가정집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안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현관에서 거실로 통하는 좁은 복도에는 팩스에서 흘러내린 용지가 길게 늘어져 있고 타자기에는 타자를 치다가 중단한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2층 좁은 복도에는 남성의 시신이, 침실에는 여성의 시신이 심하게 부패된 상태로 놓여있었다. 여성의 이름은 ‘녹색의 여신’으로 불리던 40대 중반의 페트라 켈리였고 남성의 이름은 전직 군 장성으로 켈리를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며 호위해온 60대 후반의 게르트 바스티안이었다.

경찰은 다음날 “10월 1일 바스티안이 잠들어있던 켈리를 향해  38구경 데링거형 권총으로 한 발을 쏘고 방을 빠져나와 자신에게 한 발을 쏘았다”고 발표했다. 경찰에 따르면 두 시신은 거의 3주 가량 방치된 상태였다. 문제는 두 사람이 죽기 전 상황을 설명해주는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언도 정치적 견해도 없었고 사전 낌새도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바스티안이 왜 그녀를 쏘았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수사를 종결했다.

 

▲페트라 켈리

페트라 켈리(1947~1992)는 독일 나치의 온상인 바이에른주의 귄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와 살았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해야 했기에 켈리는 외할머니 손에 키워졌다. 외할머니는 훗날 켈리가 반핵운동을 할 때나 정치인으로 활동할 때나 동지이자 참모로 켈리의 활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녹색 할머니’였다.

어머니는 켈리가 10살이던 1957년 당시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장교와 재혼했다. 이후 켈리의 이름은 페트라 레만에서 페트라 켈리로 바뀌었다. 여동생 그레이스 페트리샤 켈리는 1959년 5월 태어났다. 켈리는 1959년 11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조지아주의 작은 군사도시 포트베닝에 짐을 풀었다. 양부는 근무지가 자주 바뀌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1945년 9월에는 원폭이 투하된 일본에 주둔한 바 있고 1963년 11월에는 한국으로도 파견되어 1년 간 근무했다.

켈리가 살았던 조지아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이웃 앨라배마주에서 인종차별 철폐 활동을 벌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투쟁에 공감하고 열광했다. 켈리는 1966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에 입학했다. 매사에 적극적이어서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하고 탁월한 웅변 실력을 자랑했다.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선거캠프에도 참여해 대중동원과 조직, 군중의 속성 등을 배웠다.

암으로 투병하던 여동생 그레이스의 꿈이 교황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직접 편지를 써서 동생이 교황 바오로 6세의 축복 기도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동생은 1970년 2월 세상을 떠나 켈리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켈리는 훗날 동생이 원자력에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동생이 죽었을 때 집 부근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었고, 양부가 1945년 주둔했던 일본에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심증을 뒷받침했다.

켈리는 1970년 대학을 졸업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1971년 5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해 10월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공동체(EC) 집행위원회 임시직을 거쳐 1972년 10월 유럽공동체 행정사무관으로 채용되었다. 그 무렵 그가 주목한 것은 여성의 권익 보호와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핵이었다. 그는 곳곳의 반핵운동 현장으로 달려가 해박한 지식과 열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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