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을 위한 변명… ‘국수적 시각’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아

↑ ‘삼국사기’(왼쪽)와 김부식 영정

 

‘삼국사기’ 꼼꼼히 읽어보면 김부식이 ‘사대주의자’ 아니라는 것 알게 돼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사대주의자라는 평가를 들으신 분이 많을 겁니다. 존경하는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 조차도 삼국사기 번역자로서 글을 쓰면서 “(김부식의 서술 중) 어떤 대목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사대적”이라고 쓸 정도였습니다. ‘사실 추구’를 지상의 목표로 삼으셨던 두계 선생마저도 이 정도였으니, 다른 한국사학자들은 ‘일러 무삼하리요’일 겁니다. 한데 정말로 그가 ‘구역질 날 정도의 사대주의자’였을까요?

예를 들어보지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원년(500년) 기록에서 김부식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필자는 말한다(論曰). 신라왕으로 거서간으로 불린 이가 한 사람, 차차웅으로 불린 이도 한 사람, 이사금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은 네 사람이다. 그런데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은 저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현재 전해지지 않음)에서 신라의 모든 지배자를 다 (중국식 용어인) ‘왕’으로 불렀다. 거서간(이니 차차웅이니) 등으로 칭하지 않았다. 혹시 신라의 말이 천박하여 칭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긴 것일까? ‘좌전(左傳)’과 ‘한서(漢書)’는 모두 중국의 역사책이지만 (이민족이 세운 국가로 중국인들이 여긴) 초(楚)나라 말인 ‘곡오도’(穀於莬, 호랑이가 젖을 먹여 키운다는 뜻)니, 흉노(匈奴)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 ‘천자’라는 뜻) 등을 그대로 보존해 기록했다. 신라의 일들을 기록할 때 신라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마땅하다 본다.>

김부식을 ‘골수까지’ 사대주의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삼국사기’를 꼼꼼히 읽다가 이런 구절들을 접하게 되면 그를 단칼에 ‘사대주의자’로 부르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자신의 원칙에 따라 신라 1대 임금인 박혁거세는 ‘거서간’으로, 2대 임금인 남해는 ‘차차웅’으로 불렀습니다. 최치원처럼 모두를 중국식 용어인 ‘왕’이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왜 신라 말을 쓰지 않느냐. 혹시 신라 말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라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우리 것’에 대한 그의 애정이 여실히, 오롯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였다면, 중국 역사가들을 어떻게 준열히 비판하나

그가 경주 김씨였기에 신라에 유독 우호적이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군이 신라를 30여 차례 침공했다거나, 수도 경주가 왜군에 다섯 차례 포위되거나 침공당했다는 것을 ‘삼국사기’가 꼼꼼히 기록한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신라로서는 무척이나 치욕적인 사실인데요.

하나 더 살펴볼까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8년(649년) 기록에서 “당 태종이 죽으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끝낼 것을 지시했다”고 말한 뒤 김부식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자신의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제압돼 꼼짝을 못하고 포위되는 등 위기에 처해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그런데도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구당서’나 ‘신당서’, 그리고 ‘자치통감’ 등은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중국의) 체면을 살리자고 이런 사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두계를 포함, 한국사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김부식이 ‘뼛속까지’ 사대주의자였다면, 중국 역사가들을 준열히 비판한 이런 태도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는 삼국사기 곳곳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표현하면서 중국과 대비할 때 ‘우리’라는 말을 씁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고구려를 침입하면 ‘우리를 침입했다’고 썼지요. 사대주의에 ‘절어’ 있었다면, 이런 표현이 과연 가능했을까요?

‘삼국사기’를 꼼꼼히 읽노라면,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단칼에 매도하는 게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를 ‘하나의 역사’로 본 현전하는 최초, 그리고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숱한 한국사학자들이 사대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입니다.

그는 오늘날 시각으로 본다면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썼습니다. 그렇기에 1,908세를 살다가 신선이 됐다는 단군의 이야기는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자신의 직계 선조의 국가였던 신라가 왜군에 숱하게 공격받은 것은 낱낱이 적었습니다. 당 태종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것을 기록하지 않은 중국 역사가들의 태도는 준열하게 비판했고요. 중국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도 ‘우리를 침입했다’고 적을 정도로 요즘 말로 친다면 ‘민족주의적 시각’도 강했습니다. 신라 임금의 호칭을 신라 고유어 발음을 살려 표현한 것도 이런 까닭일 것입니다. 신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신라 발음을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한국 사학계, ‘인상 비평’과도 같은 글 그만 생산해야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 제가 한국사학계를 높게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까닭입니다. 사실을 끝까지, 철저하게 살피지도 않은 채 ‘인상 비평’과도 같은 글을 생산하는 일이 적지 않은 까닭입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누군가를 무조건 매도하거나 비판하는 게 과연 적절한 것일까요? 과(過) 없는 공(功)이 어디 있겠으며, 공 없는 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영국 소설가 레슬리 폴 하틀리(1895~1972)의 표현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인데요.

더 나아가, 세계와 경쟁하며 미래를 이끌 우리 아해들을 이같이 편협한 인식 아래서 만든 한국사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국사를 ‘필수’로 가르치는 게 과연 적절한 것일까요? 21세기 중 후반기를 이끌 대한민국의 아해들은 세계 시민으로 성장해야 할 터인데요.

저는 폐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잘못 중 미래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역설적으로 ‘한국사 교육 강화’를 꼽습니다. 아니, 한국사 교육 강화가 문제라니? 지나친 비판으로 들리시나요? 한데 어쩝니까? 좌파든 우파든, ‘한국사 특수(特需)’에 편승해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만을 외치는 ‘한국사 장사꾼들’이 득실거리는 것 같은데요. 언제까지 ‘우리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외쳐야 하나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된 세계사가 아니라, 지극히 자국 중심적인 역사를 배워서 뭘 어쩌려고요? 13시간이면 서울에서 대척인 뉴욕에 날아가는 시대에 말입니다.

 

<추신>

공중파 라디오 진행자이기도 한 어느 변호사가 최근 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 “6.25 때 같은 민족인 북한에 총을 쏜 사람”이라고 비판한 대목도 결국은 이같은 ‘국수적 시각’으로 역사를 배운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면에서는 좌나 우의 구별이 없습니다.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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