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⑪] 다이애나 스펜서의 ‘세기의 결혼’… 찰스가 전 애인과의 불륜 멈추지 않아 다이애나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는 맞불로 응수했으나 결론은 비극적 결말
2021년 2월 2일 · zznz

↑ 다이애나 스펜서(왼쪽)과 찰스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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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꿈에 부풀었던 삶, 찰스 왕세자의 불륜 사실 알면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려
다이애나 스펜서(1961~1997)의 삶은 짧고 극적인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쇠락한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6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불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 입학에 실패하고 유치원 보모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13살 연상인 찰스 윈저 왕세자(1948~ )를 만나 ‘현대판 신데렐라’로 신분이 급상승하면서 세찬 격랑에 휘말렸다.

1981년 7월 29일, 런던 성바오로 성당에서 거행된 찰스와 다이애나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이었고 ‘동화 같은 결혼’이었다. 스무 살 다이애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수줍은 듯한 미소에 뛰어난 미모, 패션 감각까지 갖춘 그녀는 곧 유럽 사교계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인과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던 ‘새장 속의 새’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결혼 후 찰스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찰스에게 결혼은 왕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었다. 그는 평생을 사랑하고 함께 지낼 배우자를 찾기보다는 공석인 왕세자비의 자리를 메워줄 적당한 여인이 필요했다. 그런 점에서 아름답고 건강하고 순수한 다이애나는 왕실의 까다로운 조건에 부합했다.
다이애나의 행복은 결혼 후 잠시뿐이었다. 꿈에 부풀었던 삶은 결혼 이듬해 윌리엄 왕자가 태어날 무렵 찰스가 결혼 전부터 사귀던 유부녀 커밀라 파커 볼스(1947~ )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커밀라는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가 찰스 왕세자를 처음 만난 것은 25세이던 1972년, 자신의 약혼자인 앤드루 파커 볼스의 소개가 계기가 되었다. 커밀라는 이듬해 앤드루와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평범한 결혼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1976년 군에서 제대한 찰스 3세가 갑작스레 연락해 오면서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두 사람의 불륜이 시작되었다. 그는 1981년 찰스 3세와 다이애나가 결혼한 뒤에도 찰스 3세를 계속 만났고, 두 사람 모두 아이를 둘씩이나 둔 뒤에도 관계는 계속되었다.
다이애나는 찰스에게 커밀라와의 관계를 청산해줄 것을 읍소했으나 찰스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이애나는 폭식증과 거식증을 오가며 정신상태가 피폐해졌다.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찰스의 부정을 일러바치고 바로잡아줄 것을 간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도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찰스는 희망이 없어”라는 대답뿐이었다. 다이애나의 속은 썩어 들어갔다. 하지만 밖으로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윌리엄(1982~ )과 해리(1984~ ) 2명의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가야 한다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도 충실히 수행했다. 짧은 숏커트 헤어스타일에 심플한 정장을 차린 그녀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봉사를 실천했다. 영국 국민은 이런 그녀를 사랑했다.

다이애나도 다른 남자와 밀회 즐기는 맞불로 응수
다이애나는 자신을 왕세자의 액세서리처럼 취급하는 왕실의 태도에 깊이 상처를 입고 어느 순간부터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부부가 결정적으로 헤어질 운명을 맞게 된 것은 영국의 대중지들이 경쟁적으로 찰스와 커밀라의 관계를 폭로하는 기사를 쏟아내면서였다. 부부는 결국 1992년 12월 공식적으로 별거를 선언했다.
그 무렵 다이애나는 한 연설 코치에게 “찰스와는 3주에 한 번 정도 부부 관계를 가졌고, 6~7년 전부터는 이마저 시들해져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나도 결혼 5년 후인 24세 때 왕실에 근무하는 직원과 사랑에 빠졌는데 이 사실이 알려진 후 그는 쫓겨났고, 3주 뒤에 살해됐다”고도 말했다. 다이애나가 말한 ‘그’는 경호원이었는데 실제로 왕실 근무를 그만둔 뒤 오토바이 사고로 숨졌다.

별거 선언 후 다이애나는 승마 교관으로 처음 인연을 맺은 제임스 휴이트 소령과 밀애를 즐겼다. 둘의 관계는 1994년 10월 휴이트가 타블로이드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아주 깊은 관계였다“고 실토하고, 휴이트의 충격적인 내용의 인터뷰를 토대로 한 ‘사랑에 빠진 왕세자비’가 책으로 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자 찰스도 텔레비전과의 회견을 통해 자신의 외도를 시인하고 다이애나와의 실패한 결혼 생활을 낱낱이 폭로했다. 다이애나는 1995년 10월 30일 BBC TV에 출연해 작심한 듯 자신과 찰스와의 관계, 왕실 분위기, 승마 교관인 제임스 휴이트 소령과의 혼외정사, 찰스와 커밀라 파커 볼스 간의 불륜 등을 폭로했다. 영국 왕실의 내밀한 사정을 까발린 다이애나 인터뷰가 던진 충격은 상당했다. 당시 5800만 영국 인구 중 약 2300만명이 인터뷰를 생방송으로 시청했다. 왕실과 사전 상의 없이 나선 인터뷰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찰스와 다이애나에게 이혼을 권했다. 두 사람은 1996년 8월 28일 정식으로 갈라섰다. 커밀라는 앞서 1995년 이혼했다.
다이애나는 이혼 후 대외활동에 몰두하는 한편 남성 편력에 빠졌다. 이혼 전부터 혼외정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여러 남자와 염문을 뿌렸다. 다이애나 사후 그녀의 집사는 다이애나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파키스탄계 심장 전문의 하스낫 칸이라고 증언했다. 세상을 떠난 1997년까지 2년 동안 칸과 깊은 관계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의 어머니가 비이슬람 여성을 며느리로 맞는 것을 반대하고 칸도 다이애나로 인해 유명세를 타는 것에 심적 부담을 느껴 1997년 헤어졌다.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결론 내렸으나 음모설 끊이지 않아
다이애나의 생애 마지막 남자는 도디 알 파예드였다. 런던 헤롯백화점 소유주인 이집트의 대부호 아들인 도디는 오스카상을 수상한 ‘불의 전차’를 기획한 영화제작자였고 잘생긴 플레이보이였다.
비극은 1997년 8월 30일 일어났다. 두 사람이 파리 시내의 리츠칼튼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고 도디의 벤츠 승용차에 올라탄 것은 늦은 밤이었다. 승용차는 오토바이를 타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집요하게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속도를 한껏 높였다. 제한속도가 50㎞인 에펠탑 인근 알마교 지하 터널에서도 100㎞로 과속 질주했다. 결국 코너에서 콘크리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다시 오른쪽 벽을 받아 도디와 운전사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다이애나는 병원으로 실려갔다가 8월 31일 새벽 4시에 숨졌다. 36년의 짧은 생이었다.
파리 경찰은 “과음한 운전기사가 과속으로 차를 몰다가 일어난 단순 교통사고”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음모설이 끊이질 않았다. 도디의 아버지는 영국 왕실이 유색 인종에다 이슬람교도인 자신의 아들과 다이애나가 결혼하려고 하자 자칫하면 왕위를 이을 왕자에게 혼혈 의붓동생이 생길 것을 우려해 사고를 위장하여 그들을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한때는 다이애나가 도디의 아기를 임신해 교통사고로 위장했다는 음모설도 제기되었다. 여기에 다이애나가 죽기 10개월 전 집사에게 보냈다는, “찰스가 재혼을 하기 위해 내 차에 브레이크 파열 사고를 일으켜 머리에 중상을 입히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편지까지 공개되면서 음모설이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다.

다이애나의 장례식에는 600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려 처칠 전 영국 총리 장례식 때의 인파를 넘어섰다. 엘튼 존이 부른 추모곡 ‘바람 속의 촛불’은 그해 음반판매 1위를 차지했다. 충격을 받은 영국인들의 쇼핑 자제가 소비 급감으로 이어져 ‘다이애나 효과’라는 경제 현상을 낳기도 했다.
다이애나를 향한 영국인들의 애정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여론조사가 있다. 2002년 영국 BBC가 10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을 조사했을 때 다이애나는 3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한 역사채널이 1000명을 대상으로 ‘지난 100년간 발생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인가를 묻는 조사에서는 ‘다이애나 사망’이라는 응답이 2차대전 발발보다 더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커밀라와 찰스 3세 관계는 다이애나 사망 뒤 공식화되었고 영국 국민의 쏟아지는 비난에도 2005년 4월 결혼했다. 1970년 첫사랑을 맺은 뒤 우여곡절 끝에 이뤄낸 35년만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커밀라는 국민의 반발을 의식해 다이애나비가 사용했던 왕세자비 호칭인 ‘웨일즈 공주(Princess of Wales)’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왕세자비보다 한 단계 낮은 ‘콘월 공작부인(Duchess of Cornwall)’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2022년 9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면서 찰스 3세가 영국과 영연방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시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가 생전에 “커밀라가 왕비 칭호를 받길 바란다”고 밝혀준 덕분에 왕비(Queen Consort)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