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⑨] 퇴계 이황의 두 번 결혼과 사별… 마음은 아팠으나 재산은 쌓여

↑ 퇴계 표준영정(왼쪽)과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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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퇴계 이황은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죽어서도 조선 유학의 거유(巨儒)로 추앙받았다. 평생 140여회의 벼슬이 내려졌어도 70여회나 사양하면서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과 사상의 큰줄기를 이루었다. 다만 그가 정립한 조선의 성리학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조선에 끼친 폐해가 컸다. 그런데도 존경을 받는 이유는 겸양과 섬김, 지극한 가족 사랑, 검약과 절제롤 몸소 실천하는 삶을 죽는날까지 일관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퇴계의 이런 인품과 학문적 성취는 그와 함께 인생을 개척한 어머니와 두 아내 등 주변의 여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과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꾸렸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개인사

퇴계 이황(1501.11~1570.12)은 경북 안동 예안(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노송정 고택에는 퇴계가 태어난 방을 ‘퇴계태실’로 꾸며놓아 일반 방문객을 맞고 있다. 아버지는 이식이었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였다. 아버지의 첫 부인은 의성 김씨였는데 2남 1녀를 낳은 후 29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친은 이후 춘천 박씨를 계실(후처)로 받아들여 이의·이해·이징·이황 4형제를 낳았다. 부친이 1502년 6월 마흔 나이에 세상과 하직했을 때 춘천 박씨는 33세였고 퇴계는 유복자나 다름없는 7개월을 막 넘긴 갓난아기였다.

노송정 고택 안에 있는 퇴계태실 (출처 노송정 고택)

 

퇴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전처 소생까지 포함해 7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곁에서 보고 자랐다. 어머니에게는 가정교육을, 숙부인 이우에게는 글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 결과 1533년 대과에 급제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벼슬은 점점 높아졌으나 중년이 되고부터는 혼란한 중앙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향을 꿈꿨다. 그 과정에서 건립한 도산서원은 퇴계 삶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아있다. 1570년 70세로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 두 며느리

퇴계가 1501년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13년 전 작고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7개월 후 별세했기 때문에 집안의 큰 어른은 할머니였고 어른은 어머니였다. 퇴계는 93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1522년 숨진 할머니(영양 김씨)와, 1537년 67세로 작고한 어머니(춘천 박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성장해서는 2번의 결혼과 사별을 겪고 2명의 며느리를 맞았다. 때로는 첩도 있었고 관기와도 사랑을 나눴다.

 

▲어머니 춘천 박씨… 억척스러움과 지혜로움을 겸비한 여인

퇴계 아버지 이식이 1502년 마흔 나이에 세상을 떴을 때 퇴계의 이복형이자 맏형인 이잠 만 장가를 들었을 뿐 나머지 형제들은 어리거나 미혼이었다. 퇴계 어머니 춘천 박씨는 자신보다 9살 어린 전처 소생의 큰아들 이잠을 빼더라도 여섯의 자식과 시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33살의 젊은 어머니에게 떨어진 당장의 숙제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까지 시켜야 한다는 현실의 문제였다.

춘천 박씨는 자식들을 남겨놓고 홀로 떠난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장차 가문을 지키지 못할까봐 또 자식들을 혼기에 맞춰 시집장가를 보내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밤낮으로 일을 했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친 춘천 박씨가 매달린 일은 농사와 누에치기와 길쌈이었다. 다행히 아이들 공부는 시동생인 이우가 나서 도와주었다. 이우는 1498년 대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판과 강원도관찰사 자리까지 올랐으나 모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 후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퇴계 이황과 퇴계의 형인 이해 등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부어 두 조카가 대과에 급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퇴계의 숙부 송재 이우

 

춘천 박씨는 억척스러움과 지혜로움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편모슬하의 자식들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엄하게 가르쳤다. 퇴계가 지은 ‘춘천 박씨 묘갈명’에는 “세상 사람들이 과부의 자식은 교양이 없다고들 비꼬니 너희는 남보다 백배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러한 비웃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어머니의 훈계가 적혀 있다. 묘갈명은 묘비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에 대한 글이다.

또한 춘천 박씨는 “문예에만 치중하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도 바로 하라”고 자식들을 가르쳤다. 퇴계가 평생을 실천해온 검약 생활은 어머니의 이런 고단한 삶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어머니가 1537년 67세로 눈을 감을 때 퇴계는 초상을 치르는 내내 식음을 전폐하다가 병을 얻어 목숨을 거의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두 며느리

퇴계는 첫째 부인과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다. 둘째 부인과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퇴계가 1527년 11월 첫째 부인 김해 허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을 때 첫째아들 이준은 5살이었고 둘째아들 이채는 한달 밖에 안된 핏덩이였다.

두 아들 모두 장성해 결혼은 했으나 둘째아들은 막 결혼 후인 1548년 2월 22살의 나이로 자식없이 숨져 둘째 며느리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퇴계는 둘째 며느리의 이런 사정을 가슴아파하다가 며느리의 개가를 허락했다. 사대부 집안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이 세상을 떠나도 개가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된 당시 상황에서 대유학자 퇴계의 이런 결정은 파격적이었다.

퇴계의 첫째아들 이준의 아내 즉 첫째 며느리는 봉화 금씨였다. 퇴계는 친정아버지 못지 않은 자애로움으로 맏며느리를 대했다. 평소 며느리의 건강도 챙기는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봉화 금씨는 시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퇴계가 서울 생활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모시고 살았다.

맏며느리는 퇴계가 1570년 12월 숨을 거두고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571년 2월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다. “내가 시아버님 살아 계실 적에 여러 가지로 부족해 극진히 모시지 못했다. 그래서 죽더라도 다시 아버님을 정성껏 모시고 싶으니 내가 죽거든 반드시 아버님 묘소 가까이에 묻어주도록 하라”. 후손들은 퇴계의 맏며느리 묘소를 도산면 건지산 남쪽 퇴계의 묘소 아래쪽에 모셨다. 다만 맏며느리의 유언 얘기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여서 확실치는 않다. 그렇더라도 맏며느리의 묘소가 퇴계 묘소 100m 아래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두 번의 혼인과 사별

퇴계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아내 모두 퇴계 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퇴계는 당시 관습대로 첩도 있었다. 퇴계는 “모름지기 부부란 서로 손님을 대하듯 공경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를 ‘상경여빈(相敬如賓)’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손자 이안도가 혼인할 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부부관을 이렇게 정의했다. “무릇 부부란 인륜의 시작이고 만복의 근원이니 아무리 지극히 친밀하고 가까워도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삼가야 하는 자리다.”

조선시대 한 문인이 처고모 허씨 부인(퇴계의 첫째부인)을 위해 쓴 묘비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선생은 스물한 살 때 부인에게 장가를 드셨는데 서로 손님같이 경대를 하셨다. 평소 거처하실 때와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실 때를 보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누가 보든지 금슬이 좋지 않은 듯 의심을 하지만 오래 지내보면 부부의 두터운 정을 알게 된다.”

퇴계 표준영정(왼쪽)과 서울 남산에 있는 퇴계 동상

 

▲허씨 부인과 첫 결혼

퇴계는 22살이던 1521년 경북 영주 초곡(푸실마을) 출신의 동갑내기 김해 허씨와 결혼했다. 원래 처갓집은 경남 고령에서 의령으로 이주해 살았으나 퇴계의 장인 허찬이 안동 문씨 집안의 맏딸과 혼인한 후 처가살이를 위해 영주의 초곡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결혼 7년차인 1527년 퇴계는 경상도 향시의 진사시와 생원시 모두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으나 같은해 11월 부인이 출산후유증으로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때 맏아들 이준은 5살, 둘째아들 이채는 태어난지 한달 밖에 안된 영아였다. 퇴계는 허씨 부인의 3년상을 치른 뒤 31살 때인 1530년 후처를 맞아들이고 1533년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퇴계는 첫째 부인과 사별했는데도 경남 의령에 사는 장인(허찬)과 장모를 극진히 모셨다. 퇴계의 장인마저 1535년 숨을 거뒀을 때는 수시로 장모에게 편지를 올려 안부를 묻는 등 정성을 다했다. 장모의 병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들을 보내 문병하기도 했다. 장모 역시 말년까지 이런 퇴계에 의지해 집안의 중요한 일은 퇴계와 의논했다. 오늘날 경남 의령에 남아있는 ‘덕곡서원’은 퇴계의 이런 덕행을 기념해 1654년 당시 의령현감이 지은 서원이다. 6년 뒤 조정에서 ‘덕곡’이라는 편액을 내림으로써 사액서원이 되었다. 역시 의령에 있는 ‘가례동천(嘉禮洞天)’은 퇴계가 처가를 찾아갔을 때 낚시를 주로 하던 곳의 큰 바위에 새겨진 퇴계의 친필 글씨다.

 

▲후처 권씨 부인은 정신 장애 앓아

퇴계는 1527년 졸(卒)한 허씨 부인의 3년상을 마친 1530년 후처를 맞아들였다. 당시 퇴계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전처의 죽음과 후처와의 혼인 사이에는 첩이 있었는데 1530년 첩에게서 아들 이적이 태어났다. 다만 서자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전해지는 게 없다. 첩을 둔 이유는 두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3년상을 치르면서 홀로 어린 두 아들을 키우는 게 쉽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건강한 31살 남정네의 욕정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는 사대부가 첩을 두는 것은 관습이어서 손가락질을 받을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후처 상대는 안동 권씨 권질의 딸이었는데 정신적으로 약간의 장애가 있는 여성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에는 장인(권질) 집안의 불행한 과거와 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퇴계의 심성이 작용했다. 장인 집안의 불행한 과거는 중앙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장인의 부친(권주)과 장인(권질)이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각각 평해(울진)와 거제도로 귀양간 것에서 시작된다. 권주는 유배 중이던 1505년 자신에게 사약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투신자살했다. 아내 역시 남편의 소식을 전해듣고 자결했다.

거센 회오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권질(장인)의 아우 권전이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 신사무옥으로 곤장을 맏던 중 형장에서 숨을 거두고 그의 아내는 관청 노비로 끌려갔다. 권질도 또다시 귀양을 갔다. 유배지는 퇴계의 고향인 안동 예안이었다. 권씨 부인은 어린 나이에 숙부(권전)가 극형을 당하고 부친(권질)이 귀양을 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후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영영 회복하지 못했다.

평소 권주의 인물됨을 흠모해온 퇴계는 부자(권주·권전)가 억울하게 참화를 당하고 권주의 아들인 권질(장인)이 자신의 고향(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이따금 권질의 집을 방문해 마음을 달래주곤 했다. 권질이 예안에서 9년째 귀양살이를 하던 어느날 퇴계를 불러 “자네가 아니면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딸을 맡길 사람이 없네”라며 유언처럼 딸을 부탁했다. 퇴계는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다만 권질의 혼사 요청은 퇴계의 인품에 맞게 누군가 각색한 구전으로 전해오는 얘기다.

퇴계 삶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아있는 안동의 도산서원 (출처 도산서원)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권씨 부인을 진심으로 살갑게 대해

퇴계는 권씨 부인을 둘째 부인으로 맞은 이듬해(1531년) 지금의 온혜리 남쪽에 위치한 양곡에 달팽이집이라는 뜻의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지어 생애 첫 집을 장만했다. 퇴계는 이 집에서 전처 소생 두 아들과 지내며 학문에 정진한 끝에 재혼 3년 후인 1533년 대과에 급제해 서울 서소문에서 권씨 부인과 함께 지냈다. 퇴계는 벼슬을 제수받아 임지로 갈 때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권씨를 늘 대동하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 마음은 아내가 죽는 날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구전에 따르면 정신이 온전치 않았던 권씨 부인이 일상생활에서 간혹 기이한 행동을 해 퇴계를 난처하게 만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퇴계는 그럴 때마다 권씨 부인을 감싸주었다. 퇴계는 아내의 어이없는 행동에 노여움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주변의 이해를 구하거나 사랑과 배려로 감싸주는 인품을 보여주었다.

권씨 부인은 1546년 7월 서울에서 첫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당시 퇴계는 7개월 전 숨진 장인의 장례를 안동에서 치른 뒤 기력이 쇠잔해져 서울로 올라가지 못하고 고향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퇴계는 두 아들을 서울로 보내 시신을 운구해오도록 지시하면서 “너희들은 친어머니가 별세했을 때는 너무 어려서 상주노릇을 못했으니 지금이야 말로 친어머니와 다름없이 상주된 도리를 다하라”고 당부했다.

권씨 부인의 시신이 안동으로 운구되었을 때는 두 아들에게 비록 계모이긴 하나 생모에게 하듯이 복장을 갖추도록 했다. 두 아들은 퇴계의 말대로 계모가 묻혀있는 백지산 기슭에 여막(무덤을 지키기 위해 그 옆에 지어놓고 거처하는 초가)을 지어 시묘살이를 했다. 퇴계 자신도 주변에 양진암을 지어 1년 넘게 머물렀다.

 

▲구전으로 전해오는 기생 두향과의 사랑 이야기

퇴계는 70년을 살았다. 34세에 과거시험을 통해 벼슬길에 올랐으니 벼슬을 하거나 쉰 기간은 36년이다. 그 기간 140여회 벼슬이 내려졌지만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해 실제로 벼슬길에 올랐던 기간은 14년 10개월이다. 근무지는 대부분 서울이었고 두 차례만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에서 지방 근무를 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1548년 1월이었다. 그러나 그해 9월 넷째 형인 이해가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면서 형제가 같은 지역에 근무하지 않는다는 관례에 따라 퇴계는 9개월만에 경북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퇴계가 군수로 부임한 단양에는 18살의 관기(官妓) 두향이 살고 있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퇴계와 두향 간의 신분을 뛰어 넘은 애절한 스토리는 두향이 고이 기른 매화 화분을 새로 부임한 퇴계에 선물하면서 시작된다. 두향은 그해 2월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시름에 잠겨 있던 퇴계를 위해 거문고를 타고 매화에 대신 물을 주는 등 온갖 수발을 들면서 위로했다. 짬이 날 때면 퇴계를 모시고 장회나루에서도 풍경이 빼어난 강선대 바위에 올라 거문고를 탔다. 두향은 곱상한 외모에 글 솜씨와 악기 다루는 솜씨가 좋아 2년 전 권씨 부인과 자식을 잃은 퇴계의 헛헛한 심정을 채워주었다.

장회나루에 조성한 퇴계·두향이 사랑이야기 공원 (출처 단양군청)

 

퇴계가 단양의 절경들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할 때도 두향이 아이디어를 냈다. 단양팔경의 하나인 옥순봉은 당시 제천의 청풍 땅이었는데 두향이 퇴계에게 “청풍군수 이지번을 찾아가 옥순봉의 관할을 단양으로 바꾸도록 타협하라”고 권해 퇴계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어느덧 퇴계는 두향을 자신이 평생 동안 사랑한 매화만큼이나 아끼게 되었다. 그런데 퇴계가 부임한지 9개월 만에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두향과 이별하게 된다. 두향은 이별 후 관기 생활을 청산하고 퇴계와 함께 노닐던 강선대 아래 초막을 짓고 홀로 살았다.

그로부터 22년 후 퇴계가 숨졌다는 소식이 두향에게 전해졌다. 두향은 슬픈 나날을 보내다가 이듬해 “퇴계 선생과 노닐던 강선대 기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는 강선대에서 남한강 푸른 물로 꽃다운 몸을 던졌다. 두향묘는 강선대 부근에 마련되어 수백년간 이어져 왔으나 충주댐 건설로 강선대가 수몰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1984년 그를 기리는 사람들에 의해 위쪽으로 이장되었다. 그곳은 단양 장회나루 건너편인데 충주댐 유람선을 타고가면 멀리서나마 확인할 수 있다.

충주댐 유람선에서 촬영한 두향 묘소

 

18살 두향과 48살 퇴계의 사랑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근거 없어

두향은 실존인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두향묘의 정경을 읊은 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 여덟 두향과 마흔 여덟 퇴계의 사랑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것은 197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을 통해서이다. 정비석은 ‘명기열전’ 제21화 ‘단양기 두향’(1977.2.1~4.21) 부분에서 이황과 두향의 이야기를 다뤘다. 정비석은 단양 지방과 퇴계 문중의 인사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명기열전’의 두향편을 엮었다고 했다. 따라서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야기는 정사가 아니라 ‘야사’인 셈이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한 이가 있다. 정석태 부산대점필재연구원 교수다. 정 교수는 퇴계의 70년 생애를 날짜별로 고증한 ‘퇴계선생 연표 월일조록(月日條錄)’의 저자로 퇴계학 연구자다. 정 교수는 두향의 생몰연도조차 밝혀진 적이 없어 두향이 퇴계와 동시대에 살았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퇴계가 단양팔경을 정했다’는 얘기도 나중에 지어낸 것이다.

퇴계의 요청에 따라 제천(청풍)의 옥순봉을 단양으로 양보했다는 이지번이 청풍군수로 지낸 것도 21년 뒤인 1569년의 일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이 국가의 승인 없이 마음대로 군계(郡界)를 수정했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퇴계·두향의 러브스토리는 왜 생겼을까? 정 교수는 “퇴계는 조선 후기엔 성인의 반열에 들 정도로 추앙을 받았다”며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인간미와 일상적인 체취를 가미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 – 두향 편’ (조선일보 1977.2.1자)

 

■퇴계의 풍족한 재산은 외가·처가 덕

조선 사대부들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이재 쌓는 것을 꺼려했다. 퇴계 역시 ‘성학십도’에서 세속의 이익을 경계했다. 평소에도 검약을 강조하면서 “선비에게 가난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떳떳함”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은 이중적 모습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주로 눈을 돌린 것은 전답과 노비였다. 퇴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를 알려 주는 증거가 ‘분재기(分財記)’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으로 율곡 이이 등 조선 시대 소위 ‘뼈대 있는 가문’들은 대부분 분재기를 남겼다.

다만 퇴계의 분재기는 남아있지 않다. 대신 퇴계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의 분재기가 남아있어 대략적인 추정은 할 수 있다. 이준이 분재기를 남긴 것은 1586년이다. 퇴계가 죽은 1570년으로부터는 불과 1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아들 이준의 분재기에 기록된 재산 내역이 퇴계가 남긴 재산 규모와 거의 같을 것으로 추정한다.

분재기에 따르면 아들은 360여명의 노비와 3000두락이 넘는 방대한 전답을 거느린 상당한 재력가였다.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두락을 평으로 환산한 계산을 적용하면 아들의 땅은 약 36만평 정도이다. 아들의 분재기를 통해 당시 퇴계의 자산 규모를 가늠해보면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것을 알 수 있다.

퇴계는 어떻게 이 많은 땅을 소유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퇴계의 외가와 전처·후처의 처가 쪽 가문들이 모두 조선시대 안동권을 대표하던 명문사족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들의 분재기를 보면 퇴계의 전처와 후처의 연고가 있는 경북 영주와 경남 의령에 적지 않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북 영주는 퇴계의 첫째부인 허씨 부인의 고향이고 의령은 허씨 부인의 부친 등 김해 허씨의 거주지다. 퇴계의 장인 허찬 역시 처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아 그 가운데 일부가 퇴계의 부인 곧 허찬의 딸인 허씨 부인에게 상속되었다.

율곡 이이 등 7남매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분배하며 기록한 분재기

 

퇴계 재산, 일반 예상 훨씬 웃돌아

이준의 다섯 자녀(퇴계의 손자녀)들이 물려받은 노비는 모두 367명이다. 이 가운데 88명은 퇴계의 손자녀들이 결혼 때 받은 노비와 그 자식이고 33명은 이준이 처가에서 받은 것이다. 이 숫자를 빼면 퇴계는 대략 250~300명 안팎의 노비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꽤 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퇴계가 아들에게 남긴 각종 편지를 보면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특히 노비 규모를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개간을 통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는 황무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토지를 늘리는데 수월한 노비가 토지보다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도 퇴계가 사망했을 때 당대 사관이 조선실록에 남긴 인물평에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선조3년 12월 1일)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난하고 검소했다는 것이다. 명조실록(1558년)에도 “이황은 청빈으로 자신을 지키므로 서울에 있을 적에도 본디 집에 부리는 하인이 없어서 땔나무도 대기가 어려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평이 나온 것은 퇴계가 자신의 재산과 무관하게 검소하고 질박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낡은 갓과 신발을 몸에 걸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겨울에 양털 옷 한 벌로 20년을 지내기도 했으며 마흔에 털옷을 구입해 예순까지 입기도 했다. 퇴계 자신도 생전에 자신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다.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한 적도 많았다. 왜 그랬을까. 고생하시는 홀어머니를 통해 체득한 절약 습관이 몸에 밴 것도 있지만 재산 증식의 당위성과 원동력을 의식하다보니 이런 결핍 의식이 생긴 것이라고 해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선조수정실록 중 선조3년 12월 1일에 수록된 퇴계 이황의 졸기

 

퇴계 생존 당시의 조선은 재산상속 문제에서 철두철미한 남녀평등 사회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조선시대에 어떻게 여자들이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냐는 것이다. 해답은 퇴계 생존 당시의 조선이 재산상속 문제에 있어서만은 철두철미하게 남녀평등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조선시대 상속문서인 ‘분재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분재기에는 혼인한 딸에게도 장자와 똑같이, 어미 잃은 외손에게도 장손과 똑같이 재산을 나눠주던 옛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퇴계의 어머니와 두 아내, 며느리는 혼인할 때 자신의 가문으로 평등하게 재산을 분배받았고, 이 재산은 고스란히 퇴계의 재산으로 편입되었다. 이렇게 쌓인 퇴계의 재산은 학문을 닦는 데 경제적 밑거름이 되었다.

남녀균등상속의 전통은 17세기를 분기점으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제사를 지내는 횟수가 늘어난 것과 관련이 깊다. 분재기에는 제사를 모시는 ‘봉사’에 대해 별도의 재산을 배정해두고 있었는데, 이것은 17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사는 딸과 아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모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17세기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제사 횟수와 종류가 늘어나면서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 더 많은 재산을 주게되어 결국에는 남녀균등상속의 전통이 깨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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