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표준영정(왼쪽)과 퇴계가 태어난 노송정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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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퇴계 이황은 살아서도 존경받는 대학자였지만 죽어서도 조선 유학의 거유(巨儒)로 추앙받았다. 평생 140여회의 벼슬이 내려졌어도 70여회나 사양하면서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과 사상의 큰줄기를 이루었다. 다만 그가 정립한 조선의 성리학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조선에 끼친 폐해가 컸다. 그런데도 존경을 받는 이유는 겸양과 섬김, 지극한 가족 사랑, 검약과 절제롤 몸소 실천하는 삶을 죽는날까지 일관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퇴계의 이런 인품과 학문적 성취는 그와 함께 인생을 개척한 어머니와 두 아내 등 주변의 여인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과 어떻게 조화로운 삶을 꾸렸는지 그 과정을 살펴본다.
■개인사
퇴계 이황(1501.11~1570.12)은 경북 안동 예안(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의 노송정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노송정 고택에는 퇴계가 태어난 방을 ‘퇴계태실’로 꾸며놓아 일반 방문객을 맞고 있다. 아버지는 이식이었고 어머니는 춘천 박씨였다. 아버지의 첫 부인은 의성 김씨였는데 2남 1녀를 낳은 후 29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부친은 이후 춘천 박씨를 계실(후처)로 받아들여 이의·이해·이징·이황 4형제를 낳았다. 부친이 1502년 6월 마흔 나이에 세상과 하직했을 때 춘천 박씨는 33세였고 퇴계는 유복자나 다름없는 7개월을 막 넘긴 갓난아기였다.
퇴계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전처 소생까지 포함해 7남매를 홀로 키우는 어머니의 고단한 삶을 곁에서 보고 자랐다. 어머니에게는 가정교육을, 숙부인 이우에게는 글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 결과 1533년 대과에 급제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 터를 잡을 수 있었다. 벼슬은 점점 높아졌으나 중년이 되고부터는 혼란한 중앙정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향을 꿈꿨다. 그 과정에서 건립한 도산서원은 퇴계 삶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남아있다. 1570년 70세로 눈을 감았다.
■어머니와 두 며느리
퇴계가 1501년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13년 전 작고한 상태였고 아버지는 그로부터 7개월 후 별세했기 때문에 집안의 큰 어른은 할머니였고 어른은 어머니였다. 퇴계는 93세까지 장수를 누리다가 1522년 숨진 할머니(영양 김씨)와, 1537년 67세로 작고한 어머니(춘천 박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성장해서는 2번의 결혼과 사별을 겪고 2명의 며느리를 맞았다. 때로는 첩도 있었고 관기와도 사랑을 나눴다.
▲어머니 춘천 박씨… 억척스러움과 지혜로움을 겸비한 여인
퇴계 아버지 이식이 1502년 마흔 나이에 세상을 떴을 때 퇴계의 이복형이자 맏형인 이잠 만 장가를 들었을 뿐 나머지 형제들은 어리거나 미혼이었다. 퇴계 어머니 춘천 박씨는 자신보다 9살 어린 전처 소생의 큰아들 이잠을 빼더라도 여섯의 자식과 시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33살의 젊은 어머니에게 떨어진 당장의 숙제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공부까지 시켜야 한다는 현실의 문제였다.
춘천 박씨는 자식들을 남겨놓고 홀로 떠난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장차 가문을 지키지 못할까봐 또 자식들을 혼기에 맞춰 시집장가를 보내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며 밤낮으로 일을 했다. 남편의 3년상을 마친 춘천 박씨가 매달린 일은 농사와 누에치기와 길쌈이었다. 다행히 아이들 공부는 시동생인 이우가 나서 도와주었다. 이우는 1498년 대과 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판과 강원도관찰사 자리까지 올랐으나 모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 후 고향에 머물고 있었다. 퇴계 이황과 퇴계의 형인 이해 등의 교육에 정성을 쏟아부어 두 조카가 대과에 급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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