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신라 엘리트 이동(李同)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이유

↑ 김부식 저 ‘삼국사기(三國史記)’

 

사람은 합리적인 만큼 비합리적인 존재다.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한다면 A가 옳은데, B를 택하는 경우가 있다. 감성 혹은 감정이 앞설 때이다. 예를 들자. 2021년도 동경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다음 두 경우가 벌어졌을 때 귀하는 어떤 것을 좋아할까?

1. 한국 축구가 결승에서 일본에 져서 은메달 획득

2. 한국 축구가 3~4 위전에서 일본을 이기고 동메달 획득

당연히 1이 2보다 ‘좋은 성적’을 낸 것이다. 한데 사람들은 1의 경우를 2보다 더 반길까? 예가 너무 극단적인가? 그러면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예로 들자. 어느 신라 엘리트의 물 먹은 이야기이다.

 

신라-발해 사신, 당나라 외교 석상에서 누가 먼저 ‘상석’에 앉느냐 놓고 싸워

신라에 숱한 문인과 장군이 있었지만, 정사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름이 오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최치원 김유신 장보고 등 위인전에 오를 만한 인물 정도만이 기록돼 있다. 이는 고구려나 백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데 당나라에 보낸 유학생 신분으로 신라본기에 이름이 오른 이가 있다. ‘이동(李同)’이라는 학생이었다. 유학생 이름이 신라본기에 오른 것은 이동 외에 최치원 뿐이다. 유학생 신분으로 보자면 이동이 최치원보다 약간 선배였던 듯하다. 이동이 빈공과(중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에 최치원보다 2년 먼저 급제한 것으로 미루어 그렇게 추정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 9년(869년)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신라는 이동을 포함해서 유학생 3명을 당나라에 보냈는데, 책 사고 공부하는데 보태라고 왕실에서 은 300 냥을 하사했다고 기록했다. 이동에 대한 신라 왕실의 큰 기대를 엿볼 수 있다. 이동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유학 3년 만인 872년, 빈공과에 떡 하니 합격했다. 이 쯤 되면 ‘수재 중의 수재’ 이동의 미래는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최치원과 더불어, 유학생 신분으로 신라본기에 이름까지 올랐던 사람인데, 유학 3년 만에 그 어렵다는 빈공과에 떡하니 붙었으니, 당연히 출셋길을 달렸겠지.

신라의 당나라 유학생들 중 빈공과에 붙은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치원이 효공왕의 이름으로 당나라에 보낸 편지(서기 897년 쯤 작성 추정)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10년 기한이 지난 학생들은 신라로 돌려보내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유학생 중 빈공과에 붙은 이는 그리 많지는 않은 듯하다. 그런데 이동의 이름은 이후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최치원이 빈공과에 합격한 사실이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문왕 14년 기록(874년)에 남은 것과는 천양지차이다. 왜?

신라 엘리트 이동(李同)의 이름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발해와의 지나친 라이벌의식 때문

삼국사기에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신라와 발해는 라이벌 의식이 꽤나 강했던 듯하다. 이는 최치원이 당나라로 보낸 숱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발해는 당나라 외교 석상에서 어느 나라 사신이 ‘상석’에 앉느냐를 놓고 싸울 정도였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보낸 편지에서 발해를 ‘도적의 나라’라고까지 불렀다. 이 라이벌 의식에 이동이 단단히 ‘먹칠’을 했다.

이동이 빈공과에 합격한 872년, 수석은 발해 사람 ‘오소도’가 차지했다. 이에 대한 충격이 신라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컸다. 이동의 합격 2년 뒤인 874년, 빈공과에서 자신을 수석으로 뽑아준 것을 감사하며, 시험 주관자였던 당나라 관료(직책은 ‘상서’) 배찬에게 올린 최치원의 글에서 이를 알 수 있다. “2년 전, 오소도가 신라인을 제치고 빈공과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신발과 모자의 위치가 거꾸로 바뀐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신라로서는 치욕이었습니다. 한데 이번 빈공과에서 저를 수석으로 뽑아주시니, 이 영광이 삼한에 퍼지게 됐습니다.”

위그르 인이나 티벳트 사람, 흉노의 후손이 수석을 했으면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한데 이동은, 발해인이 수석을 한 시험에 붙은 것이다. 그러니, 이동은 빈공과에 붙고도 푸대접을 받을 수밖에. 이동의 이름은 이후 그 어디에도 등장한 바가 없다. 기실 이동이 합격했다는 사실조차, 최치원의 편지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헌강왕 11년 3월(서기 885년), 최치원이 신라로 금의환향해서 이 곳 저 곳에 비문을 쓰고, 왕을 대신해서 당나라에 편지를 보낼 때 이동은 ‘적국인 발해 사람에게 수석 자리를 뺏긴 못난 사람’이 되어 ‘찌그러진 삶’을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필자의 과장된 생각일까?

 

<추신>

1. 신라인의 코를 납작하게 누르며 빈공과에 수석 합격했던 발해 사람 오소도는 그 아들 오광찬 때에 ‘반대의 경우’를 당한다. 906년 빈공과 수석은 신라인 최언위가 차지했다. 최언위는 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로와 더불어 ‘3 최’로 불렸던 천재였다. 차석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이었다. 오소도는 당나라에 편지를 보내 “제 아들 오광찬이 수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나라는 최언위의 성적이 오광찬보다 좋았기에, 오소도의 주장을 묵살했다.(고려사 ‘최언위 전’)

2.우리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고도 부르며, 민족사에 당연히 편입시킨다. 한데, 당시 신라인들은 발해를 ‘언젠가는 통일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나라’라고 생각했을까? 신라인이 남긴 모든 기록을 전수 조사한 필자로서는 이에 대해 무척이나 부정적이다.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전체 글을 보고 싶다면 클릭!!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