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김원웅의 광복회가 ‘최재형상’ 가로채 추미애 법무장관에게 주었다는데… 8개월 동안 여권 정치인 3명에게만 수여한 ‘최재형상’의 주인공 최재형을 알고 싶다

↑ 최재형기념관 내에 세워진 ‘최재형 기념비’ (출처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by 김지지

 

김원웅 광복회장이 1월 25일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게 ‘최재형상’을 수여하면서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2010년 발족한 ‘독립운동가 최재형기념사업회’는 “최재형상을 후손과 본 사업회 승인 없이 수여한다는 것은 최 선생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사업회도 ‘최재형상’을 제정·운영하고 있는데, 광복회가 별도 협의 없이 만든 상을 특정 정치권 인사에게 주면서 독립운동 정신도 퇴색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광복회 최재형상은 2020년 5월 고 김상현 의원을 첫 수상자로 선정했고, 그해 12월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에 이어 이번에 추 장관에게 상을 수여하는 등 8개월 새 여당 정치인만 세 차례 수상했다. 정말 이들이 최재형상을 수상할 자격이 있는지 최재형에 대해 알아본다.

러시아 한인 정착촌 분포 지도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독립운동의 대부였다. 그런데도 그의 존재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1917년 러시아가 공산화되고 이후 냉전기가 70여 년 지속되어 오랫동안 그에 대한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재형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인 1869년 9월 아버지를 따라 연해주 우수리스크 포시에트(목허우) 지역의 치진헤(지신허)로 이주했다. 그해 7월 대홍수가 함경도를 덮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기사흉년’이 닥쳐 아버지가 내린 결단이었다.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 극동 지역을 일컫는 지명으로 사전적으로는 바다와 접한 땅을 말하며 지리적으로는 두만강 위쪽 동해에 인접해 있다. 한반도와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17㎞가량 접해 있다. 이곳의 핵심 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는 한때 해삼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해삼위’로도 불렸다.

최재형은 연추(얀치혜·현재 크라스키노)에 소재한 러시아 학교에서 러시아 문화와 역사를 배우다가 어려운 가정형편을 비관해 가출했다. 11살 때부터 원양상선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선장 부부의 귀여움을 받아 표트르 세메노비치란 러시아식 이름도 얻고 세례도 받았다. 이때 익힌 러시아어와 얻은 견문은 그의 큰 자산이 되었다.

6년 동안 상선을 타고 동서양을 경험하며 선진 문물에 눈을 뜨게 되자 1877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무역회사에 들어가 무역을 배웠다. 그러다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활동하며 군납 회사를 차리고 시베리아 철도 공사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 고려인들의 농장에 목축을 장려해 러시아군에 채소와 함께 돼지와 달걀 등을 공급했고, 정부가 발주하는 도로나 철도 공사에도 고려인 인부들을 데리고 참여했다. 1884년 6월 조러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러시아로 귀화했다. 그가 번 돈과 구축한 현지인 네트워크는 훗날 연해주 독립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최재형 고택을 개조해 만든 최재형기념관 (출처 독립기념관)

 

1907년 헤이그 특사도 연해주 최재형의 집에 잠시 머물러

최재형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 1895년 연추에 첫 한인 자치기관이 설립되었을 때 연추남도소의 도헌(군수)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러시아 정부가 최재형을 신임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최재형은 러시아 한인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학교 30여 곳을 세우고 한인 계몽과 가난 퇴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한인들의 난로’라는 뜻의 ‘페치카’였다. 최재형은 1896년 5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러시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1905년 개화파 박영효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6개월간 체류할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지켜보며 망국의 한을 새삼 느끼게 되어 삶의 방향을 독립운동으로 선회했다. 그 무렵 한국의 우국지사들이 연해주로 몰려오면서 연해주는 독립운동의 구심지 역할을 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로 가던 이위종, 이준, 이상설도 연해주 최재형의 집에 잠시 머물렀다.

최재형은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단체를 통합해 ‘동의회’를 결성했다. 총장에 최재형, 부총장에 이범윤,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이 선출된 가운데 안중근도 동의회 대원으로 활동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거사를 벌였을 때 하얼빈까지 안중근과 동행했던 우덕순이 동의회 회원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안중근 의거에도 최재형과 동의회가 깊숙이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의회는 연합 의병부대를 산하에 두었다. 김두성이 총독, 이범윤이 총대장으로 추대되고 안중근과 엄인섭은 참모장급인 우영장과 좌영장을 맡았다. 안중근은 가끔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 사격 훈련을 했다. 최재형은 무기와 군수품 구입 비용도 댔다. 의병부대는 1908년 6월 두만강 너머 함북 경흥군 노면 삼리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급습, 일본군을 사살하고 수비대 진지를 점령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1908년 7월에도 제2차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 4명의 일본군을 생포하는 등 적지 않은 전과를 거두었다.

오른쪽부터 최재형, 조카 레브 최, 형 알렉세이

 

1920년 일본군이 한국인 무차별 학살한 ‘4월 참변’ 때 끌려가 살해돼

최재형은 1911년 5월 이상설 등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들과 뜻을 모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에서 ‘권업회’를 조직했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상공업 등 실업 활동을 권장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족 교육과 한인 사회의 정치·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초대 회장은 최재형, 총회 의장은 이상설이 맡았으며 홍범도도 참여했다. 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 4월 창간된 ‘권업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설과 애국 논설로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권업신문. 1912년 5월부터 1914년 9월까지 발간된 권업회이 기관지다.

 

최재형은 1917년 결성된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19년 3·1 운동 후 연해주에서 결성한 임시정부 성격의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했을 때는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수락하지 않았다.

그 무렵 연해주에는 러시아혁명에 반대하는 러시아 백군을 돕기 위해 열강의 군대가 대거 주둔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조국의 독립을 도와줄 러시아혁명군 즉 볼셰비키 적군 편에 서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20년 3월에는 조선 독립군 부대 700여 명과 볼셰비키 적군 2,000여 명이 연합해 니콜라옙스크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해 일본군 수백 명을 사살하는 대승리를 거뒀다.

그러자 일제는 1920년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등지에 있는 한인촌을 무차별로 습격, 한국인 300여 명을 학살하는 ‘4월 참변’을 일으켰다. 조선인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도 이때 죽음을 맞았다. 당시 우수리스크에서 벌어진 상황을 기록한 일본 외무성 기록에 따르면 4월 5, 6일 이틀간 일본 헌병대는 조선인 가택 곳곳을 수색한 뒤 76명을 체포했다. 그들은 우수리스크 부시장을 맡고 있던 최재형 선생에 주목했다. “배일(排日) 조선인을 선동하고 우리 군을 저격하는 등 무기를 사용해 반항적인 행동을 했다. 혁명군을 원조하는 주모자로 판명됐다”는 게 일제의 판단이었다. 결국 최재형은 헌병부대에 이끌려 이송되던 중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하고 2016년 8월 최재형의 손자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다.

연해주 ‘4월참사’ 당시 일본군에 체포된 한인 지도자들과 러시아인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 (출처 반병률 교수)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