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한국 사학계를 불신하는 이유…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근대의 전령이라고?

↑ 대표적인 북학파 3인의 초상화. 왼쪽부터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다. 홍대용은 청나라 문인 엄성(嚴誠)이, 박지원은 손주 박주수가, 박제가는 청나라 학자 나빈(羅聘·뤄핀)이 그렸다.

 

‘조상들의 과학 기술 정신’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정신’ 표현 역겨울 정도

문화재 담당 기자를 하면 할수록 한국사학계에 대한 불신은 깊어만 갔다.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이니 ‘빛나는 조상들의 과학 기술 정신’이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실사구시 정신’이니 하는 말을 쓰는 것이 솔직히 역겨울 정도였다. 그렇게 찬란하고, 그렇게 빛나는 과학 기술 정신을 가진 나라가, 어찌 그리도 허망하게 외세에 강점을 당했던가?

적지 않은 한국사학자들이 조선 후기에 근대(정신)가 자생했는데, 일제의 침탈로 자생적 근대의 길이 꺾였다고 이야기한다. 실학자들이 근대의 전령이라고? 실학자의 글을 정말로 제대로 읽으신 적이 있으신가?

18세기에 이미 동양과 서양의 ‘지적 수준’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명나라 후기 이후 중국을 찾은 선교사 등을 통해 서구의 발달된 자연과학은 이미 동양에 소개돼 있었다. 그리고 이는 청에 보낸 조선의 사신을 통해 조선에도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홍대용이 지동설(그는 ‘지전설’이라고 불렀다)을 자신의 저작에서 소개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만약 실학자들이 근대의 전령이 되려면 당시 우리의 사고 방식이나 사고 체계, 교육 방식 등에 대한 통절한 반성이 선행됐어야만 했다. 왜 우리는 서구처럼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 먼저 고민한 뒤 해결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서구와 우리의 차이는 이미 압도적으로 벌어져 있었으니까. 그 차이를 알거나 느끼지 못했다면, ‘지적 청맹과니’에 불과할 뿐이다. 한데,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런 고민과 반성이. 고작해야 박지원 등 일군의 실학자들이 “청을 배우자”고만 했을 뿐이다. 그것이 소위 ‘북학’이다.

한데, 청을 배우자고? ‘중영전쟁’(19세기 중엽, 영국과 중국이 벌인 전쟁. 흔히 아편전쟁으로 불린다)을 통해 그 후진적 실체를 머지않아 낱낱이 드러낼 청을 배우자고? 청을 배우자던 실학자들이 송시열처럼 ‘(명이 망한 뒤에도 여전히) 명을 숭상해야 한다’고 외쳤던 고루한 성리학자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크게 보아 오 십 보 백 보일 뿐이다. 박지원이나 송시열이나 세계적 흐름에 한참 뒤쳐진 유학자였던 것은 마찬가지이다. 박지원 등 그나마 나은 실학자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제국주의가 발호하던 시절, 조선은 외세의 강점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조선 후기 역사 연구는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이런 사실을 잘 안다면, 조선 후기에 대한 역사 연구는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닌가? 과거에 못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타산지석 삼아 현재와 미래를 개척한다면, 그 과거는 역설적으로 큰 의미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셈이다.

한국사학계의 조선 후기 연구 동향을 보시라. 대부분이 미화이다. 그것이 반영된 것이 한국사 교과서이고. 영정조 시대는 아예 ‘르네상스’로 불린다. 한데, 도대체 뭐를 ‘재생’시켰는지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왜 유럽인들이 중세 이후 자신들이 이룬 시대를 ‘르네상스’로 불렀는가? 중세의 미망과 암흑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그리스 로마 고전시대의 화려한 부활을 이뤘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신앙에서 벗어나 과학으로 무장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나, 피가 심장 운동과 혈관을 통해 순환한다는 것도 이 시대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한데 영정조 시대에 무엇을 재생했다는 이야기인가? 세종 시대의 과학 정신인가? 어떤 과학정신? 그래서 구체적인 결과물은?

솔직하자. 영정조 시대의 태평성세는 18세기 동아시아, 더 정확히는 중국의 평안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우리 역사는 아쉽지만, 중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받았다, 최소한 현대 이전까지는. 조선의 성장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서기 전 770년~서기 전 221년)의 혼란과 궤를 같이 한다.

 

‘고조선’은 ‘조선’으로, 이성계의 ‘조선’은 ‘이씨 조선’ 혹은 ‘후조선’으로 불러야

오해의 여지가 없게 한 마디만! 필자가 말하는 ‘조선’은 소위 ‘고조선’을 말한다. 필자는 그러나 ‘고조선’은 잘못된 용어라고 본다. ‘고조선’이라는 표현은 조선이 몰락하고 근 1400 년 뒤 일연스님(1206~1289)이 처음 사용했다. 그는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중국 망명객인 위만이 쿠데타로 조선을 차지한 것(서기 전 194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때문에 ‘위만 조선’ 이전과 이후를 나누고자 했다. 그는 위만 조선 이전을 편의상 ‘고조선’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 사서 그 어디에도 일연 스님 이전에 ‘고조선’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물론 중국 사서에도 고조선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 ‘조선’일 뿐이다.

여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 자신들과 ‘단군이 건국했다는 조선’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위만 조선 이전만이 아니라, 단군이 건국했다는 조선을 ‘고조선’으로 통칭하게 됐다. 이것이 ‘고조선’이라는 명칭의 탄생 배경이다. 한데, 저작권이나 상표권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게 상도의에 맞을 듯하다. 이성계가 세웠으니 ‘이씨 조선’으로 부르든, 아니면 ‘후조선’으로 부르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필자는 그 어떤 글에서도 ‘고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장면에서 “조선은 서기 전 2333년에 건국됐으니 춘추전국시대보다 오래 전의 일이다”라고 필자를 비판하시겠다면 그는 곰이 사람이 됐다고 믿으시는 분이다. 한반도 그 어디에도 서기 2333년 정도에 ‘국가의 틀을 보이는 유적’은 발굴되거나 발견된 바가 없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서기 전 3세기 말~서기 전 2세기 초 진-한 제국이 통일하면서 조선은 몰락했다. 중국의 ‘구심력’이 주변 지역에 작용한 탓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밀려난 유민 세력이 조선에서 정권을 잡았다가(서기 전 194년), 중국 한나라의 팽창 정책에 따라 조선이 몰락한 것이다.(서기 전 108년)

 

중국 대륙의 왕조 교체 때마다 한반도에 큰 변화가 생겨

고구려의 성장과 팽창은 한나라의 쇠퇴로 인한 중국 대륙의 혼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서기 3세기 이후 대륙이 분열되니, 중국은 변경 지역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때 동북아시아 변방에서 세력을 확장한 게 고구려였다.

고구려나 백제의 몰락 역시 중국의 통일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서기 6세기 후반, 수나라가 통일한 이후 고구려를 침입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수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러나 연이어 등장한 당나라는 중국에 ‘모욕’을 주었던 국가를 남기려 하지 않았다. 한나라 건국자인 고조가 흉노족에 당한 모욕을, 후대가 두고두고 갚았던 것을 상기하시라.

고구려의 몰락을 연개소문 아들들의 분열로 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 무척이나 단선적인 사고이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면, 힘이 더 드는 것은 약한 나라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똘똘 뭉치면 중국이나 미국과 ‘맞짱’이 가능한가?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께서 “일본에 두 번 지지 않겠다”고 하신 이야기 역시 필자는 무척이나 우려스럽게 본다. 물론 우리가 일본을 이기면 너무 좋지만…. 국가 간 싸움이 일개 축구나 배구 경기가 아니지 않는가? 신라의 몰락과 고려의 성립이 당나라의 몰락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우연일까? 고려의 몰락과 조선이 건국이 원-명 교체기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일까?

중국 대륙의 왕조 교체에서 한반도 왕조가 교체되지 않았던 시기는 송-원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 정도이다. 한데 이 장면에서도 한반도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송-원 교체기에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명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명-청 교체기의 조선은 청에 ‘신하의 나라’로 전락하면서 왕조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소위 영-정조 르네상스 역시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중국의 안정 속에서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19세기 들어 중국이 외세의 침탈 속에 국가적 허약성을 드러내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 때 한반도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도 르네상스?

 

제발 역사를 냉정하게, 제대로 읽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어떤 대목에서 ‘근대성’을 느끼나?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백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냈으니 근대성이 읽히나? 그럼 “나랏말쌈이 중국에 달라…”라며 애민정신의 끝을 보이신 세종에게서는 왜 근대성을 못 읽나? 우리 민족사 최초의 ‘복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진대법(서기 194년 실시)을 실시한 고국천왕과 을파소 역시 뼛속까지 근대인인가?

조선 후기에 농업 생산성이 높아졌고 이를 통해 상업이 크게 발전했으니 ‘근대’의 자생을 주장하는 것인가? 그런 식이면,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도 근대의 자생이었나? 지중해를 내해로 삼아 국제 교역을 크게 발전시킨 로마 제국은 왜 근대가 자생한 국가가 아닌가?

서구의 근대 시기에 생산성이 높아지고 상업이 크게 발전했으니, ‘서구의 근대와 비슷한 시기에, 생산성이 높아지고 상업이 발전한 우리 역사도 근대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상동기관과 상사기관을 헷갈리는 것 이상으로 지적 무지를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유렵의 근대에는 그들만의 특징이 명확히 있었다. 그들은 중세의 ‘기독교 신앙의 미몽’에서 깨어나 자연과학의 발달을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증기기관 등 공학적 발전도 이루었다. 그런 지식이 축적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진화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인식의 전환’도 가능했다. 그것이 유럽의 근대였다.

한데, 조선 후기 역사에서 이런 지식의 ‘자생적 축적’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상복을 몇 년이나 입는 것이 옳은가를 놓고 최고 지식인들이 논쟁을 벌이는데 시간을 쏟았던 조선 후기에서 자생적 근대 정신을 읽자고?

실학자들이 송시열 등 고루한 성리학자들에 비해 역사나 국가 발전에 훨씬 긍정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학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자연과학의 힘을 그들이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그러니 교육의 혁명적 변화를 통한 본질적인 사회 개혁을 주창할 수 없었다. ‘자연과학을 배우자’가 아니라, ‘청나라를 배우자’고 외친 것에서 그들이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실학자들은 유학자들이었다. 너무도 아쉽지만, 우리에게 근대는 강화도 조약 이후 외세, 더 정확히는 일본을 통해 다가왔다. 광복 이후, 근대를 향한 창은 미국으로 향했고.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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