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인천농민 신형준의 ‘세상 바투보기’] “차라리 한국사 교육을 폐지하라!” 외치는 이유 ①… ‘세종 때 앙부일기가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라는 언론보도를 보고

↑ 미국에서 귀환한 ‘앙부일구’(출처 문화재청)

 

조선의 낙후성 드러내는 유물이 ‘조선 과학 기술의 정수’로 둔갑되는 현실

작년 말 미국에 있던 조선 해시계가 귀환했습니다. 18세기 초반 이후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다룬 <조선 과학기술의 정수, ‘앙부일구’ 미국서 귀환>(연합뉴스 2020년 11월 17일) 같은 기사를 보면 답답합니다. 연합뉴스만 이리 싣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이런 기조로 다뤘습니다. 보도자료 자체가 그랬을 겁니다. 조선 과학 기술의 정수로 본 것이죠.

18세기에 서구에서는 해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기계식 시계(스프링으로 작동하는)가 숱했습니다. 그것이 이미 청을 통해 조선 지식인들에게도 소개됐고요. 한데, 왜 조선은 기계식 시계를 도입하지 않았을까요?

기사에도 적혀 있듯, 해시계 역시 위도를 알아야 정확한 시간 관측이 가능합니다. 해시계는 그림자가 중요한데, 그림자는 위도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니까요. 서울의 위도는 1713년, 한양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을 통해 ‘북극도’라는 이름으로 선포됩니다. 북극도는 현대 우리가 사용하는 위도와 같은 방식으로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위도와 ‘수치’는 거의 같습니다. 해시계에 청나라 사신이 관측한 한양의 북극도가 적혔다는 점에서 이 해시계는 1713년 이후 제작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지구가 둥글다는 것, 해서 위도와 경도가 생긴다는 것,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 등 근대의 휘황한 지식 체계를 조선은 지극히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저 성리학적 세계관을 고집하면서요. 그러니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사고를 혁신적으로 전환할 생각을 않았던 것이지요. 지동설에 충격을 받았다는 조선 실학자의 글이 어디 한 편이나 제대로 있나요? 그저 예송 논쟁이나 했죠. 이런 나라가 제국주의 시대에 강점을 당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지요. 참 이상한 나라입니다.

자연과학에서 뒤쳐져 외세 강점을 당한 나라에서, 채 한 세기가 안 돼 삼성이라는 세계적 ‘공업 회사’를 가지게 됐는데, 여전히 자연과학에서 뒤쳐졌던 과거를 ‘찬란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하니. 제가 한국사 교육은 차라리 폐지하는 게 낫다고 외치는 이유는 이런 까닭입니다. 이런 식의 역사 교육으로는 미래를 열지 못하니까.

 

조선 세종 때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다’는 이야기에 경악

위에서 유럽에서는 해시계의 한계(밤에는 작동 불가. 낮에도 구름이 짙게 끼어 그림자가 형성되지 않으면 작동이 사실상 안 됨) 때문에 15세기부터 이미 ‘스프링으로 작동하는 휴대용 기계식 시계’를 만들었는데, 조선은 18세기 초엽에도 여전히 해시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느 선생님이 “조선 세종 때 이미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다”며 세종 때의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주장하셨습니다. 허걱! 15세기 조선에서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다고요? 위도와 경도는 잘 아시듯,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안 뒤에야 탄생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지요. 위도는, 지구 중심과 지표면 특정 지점을 잇는 직선 A와, 직선 A가 지표면과 만나는 곳과 동일한 경도에 위치한 적도면과 지구 중심을 잇는 직선 B가 지구 중심에서 이루는 각도를 말합니다. 때문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위도라는 개념 자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경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둥근 지구가 동쪽으로 자전한다는 사실을 모르면, 경도라는 개념은 명확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한데, ‘천지원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낳다)을 금과옥조로 삼던 이들이 이를 알았다고요?

만약 세종 때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다면, 이는 조선에서 세계 최초로 지구의 둥긂과 자전, 그리고 공전까지도 과학적으로 알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세종 때 위도와 경도를 측정했다“고 주장하신 분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편에 등장하는 과학자 이순지와 관련한 기록을 잘못 읽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역사교육의 어그러진 면을 단적으로 표상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사실’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저 “세종 때도 위도를 정확하게 측정했다”고 우리 역사에 대해 자랑스레 이야기했을 터이니까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 몰라도 한양 위치가 대략 북위 38도인 것은 알 수 있어

조선왕조실록 세조 11년(서기 1465년) 6월 11일 기사 중 과학자 이순지의 졸기(죽은 이에 대한 기록)에는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현대적인 문투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세종 때에 이순지가 이런저런 계산을 통해 한양은 북극성을 바라볼 때 38도 각도를 이룬다(北極出地, 三十八度)고 했다. 세종은 이를 의심했다. 그러나 훗날 중국에서 온 사람이 ’조선은 북극성과 38도 각도를 이룬다‘고 말함으로써 이순지가 옳다는 것을 알게 돼 크게 기뻐했다.”

한양의 위치가 대략 북위 38도인 것은 맞습니다. 38선 바로 아래에 있으니까요. 한데, 이것이 위도를 잼으로써 알게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이는 북극성을 바라볼 때의 각도(=앙각)를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없이도 충분히 가능한 사고입니다.

잘 아시듯, 고대부터 북반부의 항해자들은 항해할 때 ‘변하지 않는 것’을 등대처럼 삼아서 항해했습니다. 그것이 북극성이었습니다. 북반부의 항해자들은 자신이 위치한 곳과 북극성과의 각도를 재서, 항해할 때 참고했습니다. 유럽을 휩쓴 바이킹도 그랬고, 고대 그리스인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북극성은 북극과 ‘거의 정확히’ 위치가 일치합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북극의 자리에서 지표면과 90도 각도를 이루는 직선을 하늘 방향으로 거의 무한으로 뻗어 올리면 북극성에 닿는 것이지요. 때문에 북반부에서는, 북극성과 지표면이 이루는 (눈의)각도나, 이 지표면의 위도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평행한 선분에 직선을 그었을 때 ‘동위각’과 ‘엇각’은 각각 일치한다는 사실로도 입증됩니다.

이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도, 북반부에서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위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도를 구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북극성과 지표면에서 형성되는 눈의 각도를 구한 것일 뿐입니다. 이런 방식이 남반부에서는 절대로 통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남반부가 아니라, 적도에서조차 북극성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각’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그렇고, 바이킹도 그렇고, 조선 세종 때의 이순지도 그렇고, 이들은 지표면과 북극성이 이루는 각도를 계산했을 뿐입니다. 다만, 이 수치가 북극성의 ‘위치’로 인해 위도와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입니다.

 

“우리 것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여!” 외치는 게 문제

만약 한양에서 북극성과의 각도를 계산한 이순지의 방식을 ‘위도를 측정했다’고 찬양할 것이라면, 조선 세종 때보다 1800년 전에 살던 고대 그리스인들도 이미 위도를 계산했던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인이든 바이킹이든 조선 세종 때의 이순지였든, 이들이 현대에서처럼 지구 중심에서 이루는 각도로 위도를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북반부에서 고정된 하늘의 별을 바탕으로 자신의 위치를 계산했을 뿐입니다.

이는 ‘지구의 중심’을 절대 기준으로 삼기에, 북반부 뿐 아니라 남반부에서도 정확히 위치를 계산할 수 있는 위도 측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한데, 언론에 난 기사를 보십시오. 한결같습니다. “조선 과학 기술의 정수 해시계….” 언론 탓만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보도 자료 자체가 아마 그랬을 겁니다.

조선 세종 때 이순지가 한양과 북극성의 각도를 계산한 것이 과연 세계적 수준이었을까요? 그 정도의 각도 계산은 이미 바이킹들이 몇 백년 전에 이룬 것인데? 세종 때 해시계가 과연 세계적 과학 수준에 이른 발명품이었을까요? 세종 때 만든 해시계조차 외국 문물을 본떠 만든 것인데? 게다가 유럽인들은 15세기에 들어, 해시계의 한계를 이미 깨닫고 해시계보다 훨씬 정확한 기계식 시계를 그것도 휴대용으로 개발하고 있었는데요?

이게 과연 누구 탓일까요?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탓입니다. 그저 ‘우리 것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여’를 지난 수십 년간 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역시 문화재 기자를 하면서 ‘외국보다 앞선,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 등의 표현을 숱하게 썼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추신>

  1. 그런 점에서, 20세기 후반기 이후 대한민국이 이룬 놀라운 성과가 저는 무척이나 자랑스럽습니다. 적지 않은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오욕의 역사’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2. 참고로, 이순지의 졸기와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인터넷 주소를 링크합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106011_002?fbclid=IwAR0xzyoLO8ltK_ig1kU0EhAJpF3P33QUELrmsKOqro2lioDb5PMoMup63gQ

 

※‘바투보기’는
‘가까이에서 정밀하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고유어 ‘바투'(두 대상이나 물체의 사이가 썩 가깝게)와 ‘보기’를 합친 필자의 造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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