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美 뉴욕타임스 ‘펜타곤 페이퍼’ 보도 … 베트남 전쟁의 진실 밝혀내고 내부 폭로자 시대 열어

↑ ‘펜타곤 보고서’를 처음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1971년 6월 13일)

 

by 김지지

 

‘펜타곤 페이퍼’로 불리는 미 국방부 기밀문서를 입수해 통킹만 사건 조작 등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밝혀낸 닐 시핸 기자가 최근 별세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펜타곤 페이퍼’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세상에 알려졌는지 전후 사정을 알아본다.

 

뉴욕타임스,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 실상 그대로 까발려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미국 구축함을 먼저 공격해 베트남전쟁이 촉발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니….”  “미국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베트남에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니….”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 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베트남전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대니얼 엘스버그

 

기사는 오랫동안 비밀의 장막에 갇혀 있던 놀라운 사실들을 미국인에게 알려주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베트남 내전의 개입에 반대하는 군 상층부의 경고를 무시했고,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1월 남베트남 고 딘 디엠 정권의 전복을 승인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1964년 8월 통킹만 폭격을 결정하기 전 예상되는 대량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보고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모두 6면에 걸쳐 보도된 이 엄청난 고발은 대니얼 엘스버그라는 군사전문가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이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해병대 장교 출신의 엘스버그는 ‘위험, 불분명 그리고 결정’이라는 독특한 박사학위 논문을 계기로 1959년 국방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랜드연구소의 전쟁분석가를 거쳐 백악관의 자문역할을 했다. 1964년에는 1961년부터 7년 동안 베트남전쟁을 지휘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보좌하고 1965년부터 2년간은 베트남 현지에서 전쟁 전문가로서 안목을 쌓았다.

베트남에서 해병대 장교로 활동하던 시절의 대니얼 엘스버그

 

1967년 그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요청으로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베트남에서 행해진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이른바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관여했다. 맥나마라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전쟁에 의문을 품고 1967년 6월 베트남 전쟁사를 재검토하는 프로젝트에 엘스버그를 합류시킨 것이다.

 

군사전문가 대니얼 엘스버그의 고뇌와 용기의 산물

프로젝트에 투입된 수십 명의 군인과 역사학자들이 산더미같은 정부 문서와 2년여를 씨름한 끝에 ‘펜타곤 보고서’를 완성했으나 아직 완전하지는 않았다. 백악관과 CIA 서류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아 미국이 왜 진흙탕에 빠졌는지에 대한 결정적인 이유가 해명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매파에서 비둘기파로 변신한 엘스버그는 보고서를 세상에 알려 이미 늪이 되어버린 전쟁을 끝내는 데 기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보고서가 완성된 1969년 가을, 엘스버그는 47권 71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밖으로 빼내 복사를 준비했다. 만약을 위해 여러 부를 복사하려니 복사비가 많이 필요해 부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엘스버그가 전체 내용 중 1964년 통킹만 폭격 부분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동의를 구했을 때 아내는 “인류애에 대한 고문”이라며 남편의 거사를 지원했다.

엘스버그는 친구가 경영하는 광고대행사에서 밤새도록 복사한 뒤, 복사본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과 조지 맥거번 상원의원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는 위법행위를 피할 생각으로 직접 공개하지 않고 당시 국방장관에게 비밀보고서의 의회 제출을 요청하는 편지를 몇 차례 쓰다가 중단했다. 맥거번은 “나는 의원으로 중요한 일을 하니까 당신이 교도소에 가는 게 어떤가”라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던 중 1970년 4월 말 미국이 캄보디아까지 침공했다. 엘스버그는 더 이상 미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각오로 1971년 3월 뉴욕타임스의 닐 시핸 기자에게 ‘펜타곤 보고서’의 존재를 알렸다. 다만 엘스버그는 시핸 기자에게 보고서를 보여주면서 “문서를 복사하지 말고 보거나 내용 메모 정도만 하라”고 요청한 뒤 문서를 자신의 집에 보관했다. 그러자 시핸은 엘스버그가 휴가를 가 집을 비운 사이 문서를 빼돌려 복사했다. 그러나 7000쪽에 달하는 서류를 복사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사용한 교외의 부동산 업체 내부의 복사기는 엄청난 분량의 복사량을 견디지 못하고 작동을 멈췄다. 보스턴 시내의 한 복사업체에선 해군 출신의 업주가 기밀 서류가 복사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시핸 기자는 하버드 대학교수로부터 기밀에서 해제된 서류를 빌려 연구 중이라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닐 시핸 기자

 

뉴욕타임스 기자들 “모두 감옥에 가더라도 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

뉴욕타임스 사주인 아서 슐츠버거는 몇 주간이나 게재 여부를 놓고 고민을 계속했다. 법률고문을 비롯 편집간부들과 가진 회의에서는 창업 이래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편집국장 등 고위 간부들은 발행인에게 기밀문서를 기사화하도록 강력히 요청하고 기자들은 “모두 감옥에 가더라도 기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기사화를 결정한 뉴욕타임스는 이 건을 ‘프로젝트 X’로 명명하고 보도 준비에 착수했다. 닐 시핸 등 취재팀 4명은 힐튼호텔에 경비까지 세운 비밀취재본부를 차려 3개월간 보고서를 검토하고 분석했다.

폭로 기사는 1971년 6월 13일의 첫날 보도에 이어 10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닉슨 행정부가 “미국 국방상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다”며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이 3회분 기사가 실린 후 신청을 받아들여 연재는 중단되었다.

시리즈가 중단되자 이번에는 엘스버그로부터 4000쪽 분량의 보고서를 입수한 워싱턴포스트가 6월 18일 기사화했다. 보도에 앞서 워싱턴포스트도 고민이 많았다. 법률고문은 대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보도를 유보하자고 했으나 편집국장 브래들리와 베테랑 기자 프리츠 비비 등은 보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안은 워싱턴포스트의 존폐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민감한 문제였다.

만약 대법원이 이 보도행위를 간첩법 위반으로 판결할 경우 각종 악영향과 더불어 수억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될 TV 방송국 허가 갱신 취소, 주가 폭락 등의 문제가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주인 캐서린은 용기를 내 “go ahead!(발행하라!)” 지시를 내렸다. 보도를 통해 베트남전 확전 명분으로 삼은 ‘통킹만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반전 운동이 더욱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워싱턴포스트지의 첫 펜타곤 페이퍼 관련 기사(1971년 6월 18일)

 

美 연방대법원, 언론자유 손 들어줘

전국적으로 많은 신문이 진실보도 억압에 항의하면서 국가안보에 무해하다는 정당성과 논리를 앞세워 닉슨에 도전하는 가운데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재판 결과에 따라 엘스버그는 문서오용 및 절도죄 등 12가지 중죄를 저지른 혐의로 115년형을 선고받을 수도 있었다.

닉슨과 측근은 ‘배관과’라는 별칭이 붙은 특별 부서를 설치해 엘스버그의 집을 도청하고 병원치료 기록을 빼내는 등 그를 인격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한 공작을 폈다. ‘배관공’들은 엘스버그를 곤란하게 할 어떤 의료기록도 찾아내지 못했지만 문제는 의료기록을 찾고 못 찾고가 아니었다. 이러한 범법행위로 무감각해진 닉슨 정부의 도덕성이 1년 뒤 정적의 선거자료를 찾아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 침입하는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키는 데 아무런 고민 없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움직임 속에 1971년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이 있었다. 대법원이 6대 3으로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국가는 이를 억압할 수 없다”고 판결함으로써 언론자유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국가 기밀이란 이유로 수정헌법 1조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긴 역사적 판결이 되었다. ‘펜타곤 페이퍼’는 내부 폭로자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1971년 6월 30일 미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판결을 보도한 워싱턴포스트지 기사(7월 1일)

 

펜타곤 페이퍼 보도 뒤 연락이 끊겼던 시핸과 엘스버그는 NYT 보도 후인 1971년 겨울 뉴욕 맨해튼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뒤통수를 맞았던 엘스버그는 시핸에게 “나처럼 당신도 문서를 훔쳤네”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핸은 “미국인이 낸 세금과 미국의 아들들이 흘린 피로 만들어진 서류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읽을 권리가 있다. 나도, 당신도 서류를 훔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엘스버그는 1973년 절도와 간첩 등의 혐의로 기소됐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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