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중국 공산당의 남창 기의와 모택동의 정강산 입산

중국공산당, ‘남창 기의’ 첫 총성을 계기로 자체 군대 조직해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이 ‘상해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수년간 유지되던 제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이후 무한에서도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테러가 자행되고 호남성 전역에서도 군벌의 좌익 학살로 3만 명이 살해되었다.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이 지하로 숨어든 가운데 1927년 7월 말 공산당 중앙확대회의에서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는 일제 봉기가 의결되었다.

최초 봉기는 주은래의 지휘로 남창에서 일어났다. 주은래, 하룡, 엽정, 주덕. 유백승 등을 비롯해 3만여 명이 봉기한 ‘남창 기의’로 공산당군은 8월 1일 남창을 수중에 넣었으나 3일 후 국민당군의 반격으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남창 기의에는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비롯해 200여 명의 조선인 투사도 참가했다.

남창 기의는 중국공산당이 자체 병력으로 국민당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인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중국공산당사는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룬다. 남창 기의의 첫 총성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은 자체 군대 즉 홍군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홍군을 기반으로 무장혁명 투쟁 노선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인민해방군의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는 8월 1일은 이 남창 기의를 기념하는 날이다. 1955년 9월 중국 정부가 이른바 ‘10대 원수’를 선정할 때도 ‘10대 원수’에 포함된 주덕, 진의, 하룡, 유백승, 임표, 섭영진, 섭검영 등 7명이 남창 기의에 참가했을 정도로 중국공산당에서 남창 기의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크다.

남창 기의 실패 후 공산당은 8월 7일 한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해 공산당 대표 진독수의 우경 기회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곧 구추백이 당권을 장악한 공산당은 토지혁명과 홍군의 무장 강화를 통해 장개석 정부에 저항하기로 하고 호남·호북·강서·광동성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택동의 유명한 말은 이 회의에서 나왔다.

 

‘추수 봉기’ 실패 후 전략요충지 정강산으로 들어가

모택동은 당의 결정에 따라 9월 9일 다른 3개 성과 함께 호남성 장사에서 ‘추수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제대로 군사교육도 받지 못하고 신식 무기도 없는 농민군이 신식 군대를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런데도 공산당 본부가 재차 장사를 공격하라고 하자 모택동은 얼마 남지 않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해 따르지 않았다. 그러자 공산당 지도부가 모택동을 중앙위원회와 호남성 지부 집행부에서 쫓아냈다.

모택동은 1,000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1927년 10월 호남·강서·광동성으로 통하는 전략 요충지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평균 해발고도가 1,000m인 정강산의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주변 지역을 유격전으로 조금씩 접수하며 혁명 근거지를 확대했다. 그러나 도시 봉기를 우선시하는 공산당 지도부는 모택동이 농촌에서 토지혁명과 군사작전을 병행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1927년 11월 광동성 해풍현과 육풍현에서 봉기해 중국 최초의 해륙풍 소비에트를 구성하고 12월 광주에서도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광주 봉기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무려 1,000여 명이 살해된 광주 봉기에서 조선인도 200~300명 희생되었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김성숙·오성륜과 함께 광주 봉기에 참가했다. 해륙풍 소비에트도 1928년 1월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다. 공산당은 이렇게 1930년 전반까지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 결국 조직이 산산조각이 났다. 5만 명의 당원은 1만 명으로 급감하고 호남성과 광동성의 지도자는 대부분 죽거나 죽게 될 운명에 놓였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구습을 정강산에서 일소해

모택동이 입산한 정강산은 불모의 땅이지만 훌륭한 소굴이었다. 모택동은 그 지역의 유명한 도적 두목과 협상해 600명의 인원과 소총 120정을 획득하고 유랑자나 떠돌이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2년 후 홍군의 과반수는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라 부랑자들이 차지했다. 모택동은 민병대와 적위대를 조직하고 자신의 장기인 교육을 강화했다. 그러던 중 호남성 남부로 이동해 군벌 군대와 싸우라는 당 중앙의 명령을 받고 이동했다가 정강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군대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어려움을 겪었다.

정강산은 한 달 뒤 탈환했으나 이번에는 당 중앙이 모택동을 감독하기 위해 1928년 4월 주덕을 정강산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주덕은 모택동을 견책하기는커녕 오히려 동조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부대를 합쳐 1만 명 규모의 새로운 부대를 편성했다. 주덕의 가세는 유방과 한신, 유비와 제갈공명의 결합에 버금가는 두 영웅의 만남이었다.

모택동은 토지 재분배 등의 방법으로 농촌 속에 혁명 근거지를 삼으려는 구상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정강산에서 모택동이 활용한 전법이 ‘적이 진공하면 우리는 퇴각하고(敵進我退), 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하고(敵駐我擾),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하고(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敵退我追)’는 이른바 ‘16자 전법’이다.

모택동은 중국인들이 익숙해 있는 점령군의 모습과 달리 마치 물속의 물고기처럼 민중과 하나가 되는 군대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정치와 전투를 동전의 양면으로 간주했다. 모두가 싸우고 모두가 정치 활동을 하는 것이다. 또한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구습을 정강산에서 일소했다. 군인들의 물품 강탈과 부녀자 강간을 금지하고 식량을 가져갈 때는 돈을 지불하도록 했다.

 

중국 최초의 공산당 정부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강서성 서금에서 수립

1928년 12월 장차 인민지원군 총사령이 될 팽덕회가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정강산에 입산했다. 모택동과 주덕은 더 나은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1929년 1월 주력군을 이끌고 정강산을 떠났다. 모택동과 주덕은 강서·복건 두 성을 전전하다가 강서성 서금에 근거지를 확보한 뒤 강서성 남쪽을 차례차례 점령했다.

한편 이립삼 주도의 공산당 지도부는 1930년 6월 상해에서 회의를 열고 도시 점령을 결의했다. 결정에 따라 홍군이 남창·무한·장사 등의 대도시를 공격했으나 국민당군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도시 노동계급의 소극적인 호응으로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이 공격을 통해 중국공산당과 홍군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는 점에서 완전한 실패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실패는 실패였던 터라 공산당 지도부는 1930년 11월 도시 노동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려 한 이립삼과 스탈린주의자들의 퇴진을 결정했다. 도시 봉기를 우선한 이립삼 노선도 폐기되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 장개석이 초공전(剿共戰)을 미루고 남경으로 돌아간 사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산당 정부인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이 11월 7일 강서성 서금에 수립되었다. 뒤이어 열린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는 600여 명의 대표가 참석해, 중화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모택동을 정부 주석, 주덕을 군사위원회 주석 겸 홍군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정부의 수반일 뿐 실권이 없었다. 1932년 공산당 본부가 모택동을 견제하기 위해 아예 강서로 이전한 뒤에는 더더욱 그랬다. 모택동은 정부 수반인데도 정책 수립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훗날 모택동은 “나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당 중앙에서 아무 소리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장개석 군대를 격퇴하는 임무는 주은래에게 주어졌다. 홍군이 장개석의 제4차 포위 공격(1933.4)까지 격퇴하면서 모택동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게다가 당시 모택동은 병을 앓고 있었다. 결국 1934년 1월 서금에서 열린 중화소비에트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주석에서 물러났다. 모택동은 말라리아와 장염까지 걸려 대부분을 누워 지내야 했다. 장개석이 1934년 또다시 7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펼치며 5번째 총공격에 나서자 공산당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강서성을 포기하고 1934년 10월 대장정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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