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충남 예산 덕숭산(495m)은 천년고찰 수덕사의 기운이 넓게 퍼져있고 역대 고승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있는 명산

↑ 수덕사 모습. 뒤에서 수덕사를 감싸고 있는 산이 덕숭산이다.

 

by 김지지

 

■덕숭산에 오르다

 

▲덕숭산은 이런 산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주말마다 전국의 명산을 찾는다. 11월 28일에도 충남 홍성의 오서산을 다녀왔는데 오른쪽 허리가 불편했다. 해서 1주일 뒤 토요일에는 집에서 뒹굴뒹굴 데굴데굴하며 쉬었는데 나아지기는커넝 더 악화되는 것 같았다. 다음날(일요일)에도 차도가 없다. 하지만 몸이 근질근질하다. 산에 올라가야겠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후 내자에게 물었더니 역시 “OK!”다.

그렇게 떠난 2020년 12월 6일의 산행지는 1년 전부터 가보려다가 차일피일 미뤄왔던 충남 예산의 덕숭산이다. 갑자기 결정한 산행이어서 오전 10시에 집을 나섰다. 늦은 시간이어서 다른 때 같았으면 고속도로가 막혔을텐데 코로나19가 2.0단계로 격상되어서 한산하다. 신기한 것은 산에 다녀오니 오히려 허리가 말짱하다. 산에서 얻은 병은 산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인들에게 덕숭산(德崇山·495.2m)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처음 들어본다며 “어디에 있는 산이냐”고 되묻는다. 수덕사라고 하면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덕숭산은 이처럼 낯선 산이지만 엄연히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이다. 물론 수덕사와 부속 전각이 없다면 명산 반열에 오를 정도의 산세는 아니다. 심지어 동네 뒷산에 불과하다고 혹평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덕숭산 곳곳에 배어있는 수덕사의 기운이 워낙에 넓게 퍼져있고 역대 고승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어 명산 대접을 받는데 손색이 없다.

덕숭산 지도

 

▲주요 산행 코스

지도상으로 보면 덕숭산의 등산로는 중구난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하지만 실제 가보면 접근을 막고 있거나 길 흔적이 희미한 곳이 많다. 다만 열려있는 길은 어디로 올라가든 정상 높이가 495m에 불과해 등산 거리는 길지 않고 산행시간은 3~4시간이면 족하다. 다만 수덕사를 제대로 느끼려면 1시간을 추가해야 한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는 수덕사 대웅전 왼쪽으로 난 들머리에서 계단길(일명 1080계단)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수덕사로 하산하는 것이다. 산행 코스는 수덕사 ~ 사면석불 ~ 소림초당 ~ 향운각(관음보살입상) ~ 만공탑 ~ 정혜사(능인선원) 동쪽 옆 ~ ‘ㅏ자’ 형태 갈림길(정상까지 ↑ 0.5㎞, → 0.74㎞) ~ 전월사 ~ 덕숭산 정상 순이다. ‘ㅏ자’ 갈림길에서 직진하면 바로 정상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덕숭산 정상에서 바라본 가야산. 멀리 가운데 산이 가야산이다.

 

수덕사를 거치지 않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도 있다. 이른바 기암괴석 능선이다. 들머리는 수덕사가 아니라 수덕사 주차장이다. 부근에 예산소방서 의용소방대 건물이 있고 그곳에서 왼쪽 아래로 내려서면 내포문화숲길로 이어진다. 이후 수덕저수지 둑길 ~ 기암괴석능선 사거리 ~ 기암괴석 능선 ~ 견성암 갈림길 ~ 410m봉 ~ 주능선(금북기맥 능선)을 지나 정상에 오른다.

초입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기암괴석들이 나무숲에 숨어 있어 기암괴석 능선으로 불린다. 기암괴석능선 사거리에서 오른쪽(북쪽) 능선 길로 발길을 옮기면 곧이어 깨끗하고 매끈하게 경사진 바위(슬랩)로 올라간다. 이후 경사진 바위 상단부에 이르면 마치 악어가 입을 쩍 벌린 듯한 천장바위 오른쪽으로 솟은 돔형 전망바위가 나온다. 전망바위에서는 덕숭산 정상과 그 아래 수덕사, 견성암, 정혜사, 동쪽 아래로는 수덕사 주차장이 조망된다. 이후 모자바위 ~ 바다사자바위 ~ 고인돌바위 등을 지나면 동쪽 견성암 갈림길에 닿는다. 견성암으로 가지 않고 직진한다. 쌍둥이바위, 말안장바위 등 온갖 형태의 바위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수덕사에서 정상(495m)까지

 

덕숭산에 처음 올라가는 것이어서 가장 일반적인 코스를 선택했다. 들머리는 수덕사 대웅전 왼쪽이다. 잠시 후 길이 갈라진다. 왼쪽 골짜기 위에 놓여있는 다리를 건너 언덕에 오르면 비구니들의 선방이자 일엽스님이 수도했다는 견성암과 스님들의 수행처인 정혜사까지 아스팔트길이 나있다. 골짜기에서 견성암 방향으로 가지 않고 그냥 산길로 직진해 완만한 돌계단길(일명 1080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곳곳에 수덕사 고승들이 남긴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등산이 주는 즐거움 못지않게 관람하는 맛도 쏠쏠하다.

 

사면석불

돌계단을 오르다가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사면석불(四面石佛)이다. 1983년 예산군 봉산면 화전리의 한 주민이 산을 개간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백제시대 유일의 석조사면불을 그대로 재현해 만든 것이다. 돌기둥 4면에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이 조각되어 있다. 실제 사면불은 처음 발견된 화전리 불당골 산언덕의 보호각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 1984년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었다.

사면불상은 백제시대인 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면에는 본존불로 생각되는 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고, 나머지 면에는 여래입상이 각각 한 구씩 새겨져 있다. 곳곳이 심하게 파손되어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백제의 조각기법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사면불인 충남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과 비교할 수 있어 백제미술사와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석불이다

사면석불 모형(왼쪽)과 실제 사면석불

 

1080개 돌계단

사면석불을 지나 오른쪽으로 골짜기를 끼고 올라가면 돌계단의 연속이다. 골짜기는 물론 골짜기 건너편도 거대 바위여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걷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골짜기 건너편까지 잘 보이는 것은 지금이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근육질의 속살이 드러난 겨울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화가이자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호크니는 겨울나무의 가치를 이렇게 평한다. “여름이 되면 나무는 나뭇잎으로 가득 찬 단순한 덩어리가 되어 그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다. 나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겨울나무를 좋아한다. 환상적이다”라고.

돌계단은 각기 다른 크기의 자연석을 적당히 자른 뒤 안정적으로 땅에 박아놓은 형태다. 걷기에도 편하지만 시각적으로도 볼만하다. 전국의 많은 산에 올라갔지만 이렇게 멋지게 꾸며놓은 돌계단은 처음이다. 덕숭산의 백미를 꼽으라면 당연히 이 돌계단이다. 돌계단은 1,080개나 되는데 과거 벽초스님이 수덕사 주지로 있을 때 가꾼 것이라고 한다.

1080개 돌계단의 일부

 

소림초당, 관세음보살상, 향운각, 만공탑

사면석불에서 15분 정도 돌계단을 오르면 오른쪽 바위벼랑 위에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 선불교의 큰스님인 만공스님(1871~1946)이 1925년 손수 집을 짓고 평생을 지내며 참선하던 소림초당이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소림초당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관세음보살상이 절벽 앞에 우뚝 서 있고 그 안쪽에 향운각이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만공스님이 꿈에서 석가세존을 만난 뒤 1924년 거대한 천연암석에 조성토록 한 미륵불 입상이다. 수덕사를 내려다보는 듯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다. 향운각은 1939년 만공스님이 벼랑 위에 지은 스님들의 수행처다. 담벼락을 층층이 돌로 쌓아 만들었는데 사람 키를 훌쩍 넘어 안은 들여다 볼 수 없다. 담벼락의 돌들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져 건축상으로는 안정감이 있고 미관상으로는 정갈하다. 향운각 뒤로는 연초록의 가는 대나무가 작은 숲을 이뤄 겨울인데도 색이 대비되어 눈이 다 시원하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왼쪽으로 올라가면 만공탑과 너른 평지 쉼터가 나타나고 100m 쯤 위에 정혜사(능인선원) 돌담이 늠름하게 자리잡고 있다.

관음보살입상

 

만공탑은 만공스님의 부도탑이다. 1946년 만공스님이 열반하자 1947년 만공스님의 제자인 박중은 스님이 현대식으로 조성했다. 3개의 팔각기둥 위에 둥근 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인데 여느 부도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상부의 둥근 돌은 만공스님의 사리, 3개의 팔각기둥은 불교의 삼보, 팔각기단은 팔정도를 나타낸다.

탑에는 ‘世界一花(세계일화)’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스님은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 16일, 상좌에게 붓과 무궁화꽃 한 송이를 가져오라 일렀다. 상좌가 무궁화꽃을 따서 가져오자 붓으로 꽃잎에 ‘세계일화(世界一花)’를 휘호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라는 뜻이다. 수덕사와 덕숭산에는 만공스님의 이런 체취가 곳곳에 묻어있다.

향운각

 

▲정혜사, 전월사, 정상

만공탑에서 정상까지 거리는 1.1㎞다. 만공탑에서 100m 정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혜사(능인선원)가 나온다. 정혜사는 만공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시킨 수행처로 철마다 수십명의 스님들이 이곳에서 용맹정진한다. 수행처여서 문은 굳게 잠겨 있고 담 너머로 안의 일부만 보일 뿐이다. 정혜사 담벼락 바로 아래 왼쪽으로 멋지게 생긴 돌문이 있다. 만공스님이 머무르던 금선대 입구로 통하는 진여문이다. 양쪽에 세워놓은 큰돌 위에 또 다른 돌을 걸쳐놓아 멋지긴 한데 돌문 앞에 굵은 전깃줄이 쳐져있어 볼썽 사납다. 금선대에는 경허, 만공, 혜월, 수월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정혜사 옆길을 지나니 넓은 평지의 초록 배추밭이 나오고 그 옆을 지나면 ‘ㅏ자’ 형태의 갈림길이다. 정상까지 직진하면 0.5㎞이고 오른쪽으로 우회하면 0.74㎞다. 오른쪽으로 5분 정도 오르니 만공스님이 열반하신 전월사다. 입구 바닥에 나뭇가지로 길을 막아놓고 기와에 “넘지 마세요”라고 쓰여있으나 안쪽이 궁금해 나뭇가지를 넘어 왼쪽 안으로 들어가보았으나 문을 막아놓아 안을 살펴볼 수 없다. 소림초당, 향운각에 이어 궁금함의 연속이다.

전월사를 지나 10분 정도 올라가니 산등성이다. 대포처럼 비스듬히 하늘로 솟은 바위와 거북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으나 그곳이 멋진 조망처인 것을 알지못해 그냥 지나치니 5분 후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안면도와 천수만이 보인다는데 주위에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져 조망은 별로다. 다만 왼쪽으로 100m 정도 움직이면 앞이 탁 트인 조망터가 나온다. 무엇보다 연초에 올라갔던 가야산이 바라보여 기분이 좋았다. 오른쪽으로는 예당평야가 시원하게 펼쳐있다.

덕숭산 정상

 

▲수덕사로 하산

하산은 올라온 길로 내려가도 되지만 우리는 정상을 기준으로 올라온 길과 반대 방향인 왼쪽으로 향했다. 계속 직진하면 서쪽의 기암괴석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올라올 때 지났던 갈림길을 향해 0.5㎞를 내려가는 등산 코스를 선택했다.

올라올 때 보았던 배추밭에선 중년의 스님이 겨울 배추를 따고 있다. 잠시 지켜보고 있으니 스님이 배추 한 포기 가져가라며 건넨다. 선농일여(禪農一如)를 몸소 실천한 벽초스님이 떠올랐다. 스님에게 “수덕사로 내려가 지난 봄 복원한 충남 서산 천장사의 지장암으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스님이 “복원한 지장암에 실망했다”며 심경을 전한다. 지장암은 경허스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머물렀던 곳이다.

스님은 “천장사가 자리잡고 있는 연암산이 제비를 닮은 산이므로 천장사도 그에 걸맞게 지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크고 현대식으로 지어 연암산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한마디 한다. 스님의 말을 듣고 천장사와 지장암이 더욱 궁금해졌으나 결국에는 가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늦게 출발한데다 수덕사를 관람하느라 시간을 많이 지체해 곧 해가 서산으로 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산 후 수덕사를 기점으로 계산해보니 4㎞ 정도에 2시간 40분 걸렸다.

 

■만공스님과 벽초스님

만공 스님(1871~1946)은 전북 태인에서 태어났다. 13세이던 1884년 무작정 집을 나와 이 절 저 절을 떠돌다가 계룡산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 스승인 경허(1849~1912)를 만난 것은 경허가 동학사로 온 1884년 10월이었다. 경허는 조선 500년 동안 억불숭유로 인해 사실상 맥이 끊긴 ‘간화선’(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살려내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다. 법명이 월면인 그에게 1904년 ‘만공’이라는 법호를 지어준 것도 경허였다.

경허스님 진영(왼쪽)과 수년전 경허연구소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한 경허스님 사진

 

만공은 1905년 덕숭산 자락에 ‘금선대’라는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수행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경허에서 발원한 선의 물줄기가 비로소 만공에 이르러 큰 강물이 된 것이다. 만공은 경허가 함남 갑산에서 열반했을 때 1913년 7월 경허의 시신을 다비(화장)하고 유품을 수습했다.

만공은 1930년부터 3년여 동안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사에서 조실로 있으면서 선을 지도하고 1937년을 전후해 잠시 공주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수덕사와 정혜사 등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상대로 선풍을 드날렸으며 불교계의 거목을 키워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도량도 지어 견성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만공은 1941년, 밀물 때는 섬이었다가 썰물 때는 뭍이 되는 서산 앞바다의 작은섬(간월도)에 들어가 간월암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42년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바깥출입을 삼가고 지극정성으로 천일기도를 올렸다. 스님이 천일기도를 마치고 3일 후 우리나라는 일본 통치 35년 만에 마침내 독립했다. 말년에는 덕숭산에 전월사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 20일(음력) 열반에 들어갔다. 법랍 62세, 세수 75세였다.

벽초스님(1899~1986)은 덕숭총림 2대 방장이다. 스님은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9살 때 탁발 나온 만공스님에 감화되어 아버지(훗날 연등스님)와 함께 수덕사에서 출가했다. 스님은 만공을 따라 금강산, 오대산, 지리산 등 명산 대찰을 찾아 정진하다가 1930년 수덕사로 돌아왔다. 1940년부터 30년 동안 주지로 있으면서 빈약했던 수덕사를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백양사에 버금가는 5대 총림의 하나로 일신시켰다. 그는 보통의 주지와 달랐다. 불목하니(절 머슴)처럼 몸소 일을 했다. 수덕사의 주요 전각은 물론 정혜사, 견성암, 전월사 등 덕숭총림 안 사찰들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선농일여(禪農一如) 정신은 세간에 큰 귀감이 되었다.

만공스님 사진(왼쪽)과 벽초 스님 진영

 

■수덕사

 

▲수덕사는 이런 절

덕숭산에 왔는데 수덕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문제는 수덕사가 고찰(古刹)에 대찰(大刹)이어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려면 시간이 제법 걸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수덕사 관람을 덕숭산행 전에 할 것인지 후에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수덕사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백제 위덕왕(554-597) 창건 설이 유력하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반포 후 마곡사 말사로 편입되었다가 1962년 통합종단 출범 후 조계종 제7교구본사로 승격하고 1984년 전국 8대 총림 중 한 곳인 덕숭총림으로도 승격되었다. 전국 8대 총림은 수덕사를 비롯 송광사, 통도사, 해인사, 수덕사, 백양사, 범어사, 동화사, 쌍계사 등이다.

수덕사는 구한말 선불교를 중흥시킨 경허스님을 필두로 만공스님, 혜암스님, 벽초스님, 원담스님, 설정스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잇고 있다. 그런데 수덕사가 유명해진 데에는 다른 요인들도 있다. 수덕사에서 수행한 비구니 일엽스님이 1962년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를 펴내 세인의 관심을 끌고, 가수 송춘희가 1966년 ‘수덕사의 여승’이란 가요를 발표해 대박을 터뜨리면서다.

수덕사 전경(출처 충청남도)

 

일주문 편액

수덕사는 초입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가 있는 선문을 통과해 일주문 → 금강문 → 사천왕문 등 4개문을 지난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기왕에 지나가는 길이라면 일주문에 붙어 있는 ‘德崇山 修德寺(덕숭산 수덕사)’라는 편액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이 글씨를 쓴 사람이 소전 손재형이기 때문이다.

일주문

 

그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歲寒圖)’를 1944년 일본에서 찾아온 수집가다. 세한도는 1844년 58세의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그린 그림이다. 귀양살이하는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지금의 베이징)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 준 제자 이상적에게 답례로 ‘날이 추워진(歲寒)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도록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글과 함께 그려 보냈다. 작품은 그해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상적을 따라 중국을 여행했고, 1943년엔 일본인 주인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기도 했다. 그것을 1944년 손재형이 구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주인이 바뀌어 개성 갑부였던 실업가 손세기 손에 넘어갔다. 그 아들 손창근이 소장해오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손재형은 당대 최고의 수집가답게 1920년대 초 추사의 글씨 ‘竹爐之室(죽로지실)’을 당시 집 한 채 값에 육박하는 1000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국보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금강전도(金剛全圖)’, 역시 국보인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 같은 명작들도 소장했다. 손재형은 특히 서예의 현대화를 개척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다. 독특한 소전체(素筌體)를 통해 광복 이후 국내 서예계를 풍미하기도 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문학월간지 ‘現代文學’의 제자(題字)도 그의 글씨다. 이 독특한 서체의 손재형 글씨가 수덕사 일주문에 걸려 있는 것이다.

 

▲대웅전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 49호)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이다. 1937년 해체 수리 때 나온 묵서명(墨書銘)에 의해서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덕사 대웅전

 

단청을 칠하지 않은 맨살의 목조건물이어서 수백 년의 깊이가 뿜어져 나온다. 건물구조도 단순해 소박함과 우직함이 느껴지고 일체의 장식을 배제해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다. 대웅전의 두드러진 특징이자 묘미는 맞배지붕에 있다. 맞배지붕은 지붕이 건축물의 앞뒷면으로만 맞붙어 있는 형태의 지붕을 말한다. 이와달리 부석사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위에 삼각형의 벽이 있는 팔작지붕은 기본적으로 멋이 있으나 간결함이 부각되는 맞배지붕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맞배지붕은 전통 기와 건물의 지붕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식이어서 최소한의 지붕선만 있을 뿐 어떠한 장식이나 꾸밈이 없다. 불필요한 것,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다 덜어내고 뼈대만을 건축으로 구현한 형태다. 미끈하게 빠진 대웅전의 배흘림 기둥은 풍만하고도 푸근하다. 이처럼 건축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 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03호다. 사천왕문 지나 왼쪽에 있는 칠층석탑은 1930년 만공스님 때 건립한 석탑이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181호다.

대웅전 맞배지붕(출처 충청남도)

 

▲견성암

견성암은 1908년 만공스님이 창건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방이다. 초가집에서 출발해 함석집, 기와집으로 증·개축을 거듭하다 1965년 벽초스님이 인도식 2층 석조 건물로 지은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편액은 만공스님 친필이다. 다만 현재 건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담한 사이즈의 암자가 아니라 대형 건물이어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견성암이 대표적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자리잡게 되는 데는 만공스님과 법희스님, 그리고 일엽스님의 원력이 크다. 만공스님은 견성암이 비구니 선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법희스님, 일엽스님 등 비구니 상좌들에게 전법게를 내려 비구니 승가가 발전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법게는 서신 형식으로 서두에 법을 받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고 말미에 법을 전하는 이의 설(說)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법희스님(1887~1975)이 1916년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음으로써 한국 비구니 법맥의 새 장도 열리게 되었다.

수덕사 견성암

 

일엽스님은 여성 수행자에 대해 관심이 적었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도 뛰어난 수행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 비구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비구니 승가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엽스님은 1928년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한 이후 출가하고, 1933년 견성암에 들어온 이후 25년간 수행을 거듭했다.

견성암은 수덕사에서 정혜사로 올라가기 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과거 벽초스님 시절, 덕숭산에서 수행한 선승들이라면 견성암과 정혜사 사이의 보초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산 위 정혜사는 비구선원이고 산 아래 견성암은 여성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비구니선원이어서 비구와 비구니가 야밤에 산에서 만나는 것을 막기 위해 벽초스님이 삼경에 보초를 섰다고 한다.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간 곳에 있다. 조선조부터 구한말까지 손님이 거처하던 이곳에는 나혜석과 일엽스님의 자취가 남아있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남녀평등과 자유연애의 기치를 내세우며 한 시대를 풍미한 신여성의 선두주자였다. 일엽스님은 1933년 수덕사에서 출가하고, 나혜석은 1937년 일엽에 의지해 지친 삶을 보듬고자 수덕사를 찾았으나 출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40년대 초까지 수덕여관에 머무르다가 떠났다.

일엽 스님

 

이응로(1904~1989)는 1944년 이 집을 사서 1959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살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다가 1967년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파리에서 붙잡혀와 옥살이를 하고 풀려나온 뒤 1969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바위 2개에 몇 점의 문자 추상 암각화를 새겼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추상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덕여관의 지금 주인은 2005년 이응로의 큰조카로부터 여관을 매입한 수덕사다.

수덕여관

 

■이번엔 놓친 곳 = 다음엔 가봐야 할 곳

어디엔가 다녀오고 나서 산행기를 쓰려고 자료를 찾다보면 다녀오지 못해 아쉬운 곳이 꼭 남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여서 숙제로 남아있다. 경허 스님의 자취를 복원한 천장사 지장암은 물론 만공스님의 간월암도 다녀와야 하고 정혜사와 금선대에서는 저 아래 속세도 내려다봐야 한다. 산행을 기준하면 기암괴석 능선을 올라가야 덕숭산을 제대로 이해할 것 같다. 문화재를 기준하면 실제 사면석불을 보호하고 있는 예산군 화전리 불당골 산언덕과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상(서산마애석불)도 봐야 한다. 숙제가 있으니 의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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