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펠레의 화려한 등장과 스웨덴 월드컵

↑ 펠레

 

브라질, 펠레의 활약에 힘입어 월드컵 첫 우승의 기쁨 누려

왼발 오른발 구분 없는 자유자재의 킥, 바나나를 연상케 하는 환상적인 스핀킥, 자로 잰 듯한 절묘한 패스,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 이 축구 천재의 이름은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다. 이드송은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에서 딴 이름이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천재 발명왕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이드송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발재간 때문에 본명 대신 ‘펠레’로 불렸다. 펠레는 훗날 자서전에서 “펠레라는 애칭은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 중 누군가가 붙여준 것”이라면서 의미는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을 펠레라고 부른 학교 친구를 때려주었을 정도로 펠레란 이름을 싫어했다며 본명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펠레(1940~2020)는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구두닦이로 일하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웠다. 생애 첫 스승은 부상 때문에 축구를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였다. 펠레는 1955년, 15세 나이에 브라질의 명문 클럽 산토스팀에 입단함으로써 축구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1년간의 조련기를 거쳐 데뷔전을 치른 1956년에는 한 해 동안 37골을 넣어 축구 스타의 등장을 예고했다.

1958년 6월 15일, 스웨덴 월드컵 경기를 지켜보던 세계 축구팬들은 18세 브라질 소년의 현란한 플레이에 경악했다. 그날 축구팬들이 본 건 브라질과 소련의 경기였다. 브라질은 4조 첫 경기에서 오스트리아를 3-0으로 물리쳤지만 영국과는 0-0 무승부에 그쳐 반드시 소련을 잡아야 8강 토너먼트에 오를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다. 펠레는 무릎 부상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영국을 상대로 한 처음 두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했으나 소련전에는 월드컵 사상 최연소 나이로 출전했다. 소련팀의 골키퍼는 당대 최고의 수문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레프 야신이었다. 펠레는 한 골을 어시스트했을 뿐 골을 넣지는 못했다. 하지만 총알처럼 내달리는 가뿐한 드리블과 현란한 개인기로 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축구 황제 펠레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브라질은 야신이 골문을 지킨 소련을 2-0으로 누른 뒤 8강전에서 펠레의 월드컵 첫 골로 웨일스를 1-0으로 제치고 4강에 안착했다. 강호 프랑스를 상대로 한 4강전에서는 펠레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프랑스를 5-2로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했다. 번개 같은 스피드, 정확한 기회 포착 능력, 완벽한 기술까지 겸비한 펠레는 거침이 없었다.

 

가뿐한 드리블과 현란한 개인기로 관중의 눈 사로잡아

홈팀 스웨덴과 결승전이 벌어진 것은 6월 29일이었다. 브라질이 2-1로 앞선 후반 11분, 스웨덴의 왼쪽 사이드에서 문전에 있는 펠레 쪽으로 볼이 높게 날아올랐다. 펠레는 오른쪽 허벅지로 공을 받아 상대 수비수 머리 너머로 볼을 뛰운 뒤 수비수 뒤로 재빨리 돌아나가 공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발등으로 쏘아 스웨덴의 골네트를 흔들었다. 월드컵 사상 가장 아름답고 환상적인 골로 기록된 결승골이었다.

신기에 가까운 이 골에 이어 추가골까지 터뜨린 펠레의 활약에 힘입어 브라질은 스웨덴을 5-2로 물리치고 월드컵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올린 16골 가운데 6골을 뽑아낸 펠레는 당당히 ‘베스트 11’에 뽑혔다. 펠레는 스웨덴 월드컵에서 최연소 우승 및 신인상, 최연소 해트트릭 등 각종 기록을 새로 써 내렸다. 사람들은 이 10대 소년을 ‘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브라질은 다른 대륙에 가서 우승한 첫 번째 나라로도 이름을 올렸다.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지역 예선에 참가한 55개국 가운데 16개국이 본선에 출전, 4개조로 나뉘어 스웨덴 전역에서 22일 동안 경기가 펼쳐졌다. 8강전을 거쳐 4강에 안착한 나라는 서독, 스웨덴, 브라질, 프랑스 4개국이었다. 스웨덴은 서독을 3-1로 물리치고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결국 브라질에 발목이 잡혀 분루를 삼켜야 했다. 스웨덴 월드컵은 오늘날 몇 가지 특징을 가진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펠레의 등장 다음으로 화제를 모은 것은 월드컵 사상 최다 득점왕의 탄생이었다. 주인공은 프랑스의 쥐스트 퐁텐이었는데, 그는 각각 한 차례의 해트트릭(3골)과 오버 헤트트릭(4골)을 포함해 6경기에서 13골을 넣는 가공할 득점력을 과시했다. 이 기록은 한동안 세계 최다 기록으로 유지되다가 1970년 독일의 게르트 뮐러(14골), 2006년 브라질의 호나우드(15골)에 의해 갱신되었다. 통상 ‘그레이트 브리튼’으로 불리는 영국,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4개팀이 모두 본선에 진출하는 희귀한 기록을 남긴 것도, TV를 통해 전 세계인이 축구 스타들의 활약상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도 스웨덴 월드컵이었다.

펠레는 녹색 그라운드에서 본능적 감각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었다. 스스로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어떤 순간에도 그라운드에 있는 다른 선수들의 위치를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그 선수들이 다음에 할 동작이 전부 보인다”며 자신의 본능 감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축구는 그의 발끝에서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로 승화되었다. 한 저널리스트 말마따나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축구공으로 태어나 그라운드를 굴렀을” 그런 사람이었다. 펠레의 질주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브라질 국내 무대에서 1959년 127골, 1961년 110골을 기록하고 펠레가 소속된 산토스팀은 남미 각국 최상위 클럽들이 참가하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2번(1961, 1962), 세계클럽선수권대회에서 2번(1962, 1963), 상파울루선수권대회에서 9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축구공으로 태어날 사람”

펠레는 1962년 칠레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첫 경기에서 부상해 남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동료 선수들이 두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불운은 1966년의 영국 월드컵에서도 계속되었다. 세 번째 경기인 포르투갈전에서 들것에 실려 경기장을 떠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것이다. 브라질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펠레는 월드컵에서 불운이 계속되자 1970년의 멕시코 월드컵에는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국민의 간절한 염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출전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30살의 완숙한 경지에 오른 펠레는 자이르지뉴, 토스타우, 히벨리누 등과 함께 브라질팀을 결승에 오르게 하고 이탈리아를 4-1로 꺾는 수훈갑이 되었다. 브라질의 3번째 우승은 줄리메컵을 영구히 브라질의 소유로 만들었다. 이로써 펠레는 월드컵에서 3번 우승한 전무후무한 선수가 되었다. 펠레가 4개 월드컵에 연속 출전해 성공시킨 골은 모두 12골이었다.

펠레는 유럽의 수많은 명문팀으로부터 거액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18년 동안 산토스팀을 떠나지 않는 의리를 보였다. 그 기간 그는 통산 1,000번째 골(1969.11.19)을 넣었고 92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한 경기에 4골을 넣은 게 30번, 5골을 넣은 게 6번이나 되었고, 8골을 넣은 때도 있었다. 산토스팀의 마라카낭 경기장에서는 지금도 그의 1,000번째 골을 기념해 해마다 11월 19일을 ‘펠레의 날’로 정해놓고 축제를 열고 있다.

펠레는 1971년 7월 18일 13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산토스팀 선수로는 1974년까지 활약하다가 1975년 6월 뉴욕 코스모스팀에 입단, 3년 동안 축구 불모지 미국에 선진 축구의 씨앗을 뿌렸다. 펠레가 뉴욕에서 뛴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구단은 펠레의 10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펠레는 1977년 10월 1일 화려했던 축구 인생을 마감했다. 펠레의 은퇴를 기념해 마련된 브라질의 산토스팀과 미국의 코스모스팀 간 시범경기는 미국 뉴저지주 메도랜즈 경기장에 7만 5,000여 명의 관중이 들어차고 세계 38개 국가에 위성중계되는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펠레는 전반전은 코스모스팀에서 후반전은 산토스팀에서 경기를 하며 결승골을 기록, 코스모스팀에 2-1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1956년 데뷔전부터 1977년 은퇴할 때까지 펠레는 통산 1,363경기에 출전해 1,281골을 넣고 국가 대항 A매치 경기 77골을 터뜨리는 가공할 기록을 세웠다.

펠레는 현역 생활동안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인 발롱도르를 받지 못했다. 과거 발롱도르는 유럽 국적의 선수들에게만 수상 자격을 줬기 때문이다. 1995년 이같은 국적 제한이 폐지됐고, 2013년 과거의 활약을 종합해 펠레에게 발롱도르 명예상이 돌아갔다. 1999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각국 올림픽위원회(NOC)를 상대로 실시한 ‘20세기 최고의 스포츠 스타’ 투표에서 최다 득표의 영예는 펠레에게 돌아갔다. 복싱선수 무하마드 알리와 육상선수 칼 루이스가 그 뒤를 이었다. 그해 AP통신 역시 그와 브라질 축구팀의 활약을 ‘20세기 세계 스포츠 10대 뉴스’의 첫 머리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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