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정부가 미국 송환을 추진·검토한다는, 1968년 공해상에서 나포되어 현재는 북한 대동강에 전시되고 있는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의 전말

↑ 나포되기 전의 푸에블로호

 

by 김지지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최근 KBS와의 인터뷰에서 “푸에블로호를 평양에서 워싱턴으로 송환한다면 이것을 굉장히 적극적인 신뢰조치로 받아들이고, 북·미 간 신뢰를 통해서 대화와 협상을 촉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1968년 1·21사태 때 청와대 습격을 위해 남파된 북한 124군 특수부대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씨는 “북한이 대동강변 전승기념관에 푸에블로호를 전시하는 목적은 남조선이 해방을 못 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데 미국이 결정적 장애물이 되기 때문임을 주민들에게 세뇌시키고 미국 첩보활동의 실체적 교육을 알리기 위한 엄청나게 중요한 선전물이기 때문에 어림없는 소리”라며 가능성을 일축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알아본다.

 

1968년, ‘1․21 사태’에 이어 푸에플로호까지 나포되어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 감돌아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서울에 침입한 이른바 ‘1․21 사태’가 일어나 북부 수도권 일대에서 무장공비 토벌전이 한창이던 1968년 1월 23일 오후 1시 45분경, 미 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나포됨으로써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 미 함정이 납치되기는 미 해군 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체포된 김신조

 

일본 사세보항의 미군 기지를 출발해 첩보 임무를 수행하던 푸에블로호에는 함장을 포함해 6명의 장교와 75명의 수병, 2명의 민간인 등 83명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 1척과 초계정 3척 그리고 미그기 2기로 위협하는 북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1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1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결국 원산항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했다.

수년 전 비밀해제된 미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 CIA(미국 중앙정보국), NSA(미국 국가안보국), 연방의회 등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기 전 이미 정체를 알고 있었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푸에블로호는 2차대전 말기인 1944년 미 육군이 건조한 화물선(850t)이었다. 1966년 미 해군에 인도되어 콜로라도주 푸에블로 카운티의 이름을 따서 푸에블로호로 명명되었고 1967년 5월 정보수집함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5일 일본 도쿄 인근 요코스카 해군기지를 출항, 큐슈의 사세보항에 정박했다가 1월 11일 오전 6시(이하 한국시간) 사세보항을 출발했다. 대한해협을 거쳐서 북진한 끝에 약 42시간만인 1월 12일 오후 11시 30분 공해상인 작전구역에 도착했다. 첩보활동을 하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감지된 것은 8일 뒤인 1월 20일이었다. 오후 5시 50분 3.6㎞ 전방에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난 것이다. 긴장된 순간이었으나 공해상이어서 푸에블로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나포에 가장 유리한 지점인 원산 공해상에 진입할 때까지 조용히 뒤를 밟았다.

일본 요코스카(横須賀) 해군기지 (출처 위키피디아)

 

푸에블로호 북한 선박의 감시를 받는데도 위험 감지 못해

푸에블로호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1월 22일 아침 원산 인근 공해상에까지 접근했다. 그러자 북한이 마침내 작전을 개시했다. 낮 12시에서 1시 사이 어선 1척은 1.3㎞까지 접근하고 다른 1척은 90m까지 붙었다. 오후 3시에도 북한 어선이 30m까지 접근, 푸에블로호의 동태를 살폈다. 이후에도 푸에플로호는 오후 4시부터 1월 23일 오전 10시까지 정체불명 어선들과 18차례나 마주쳤다. 그런데도 푸에블로호는 여전히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다. 1월 23일 오전 10시 50분 본부와 첫 교신에서 ‘더 이상 감시받지 않음, 침묵 유지로 변경’이라는 내용이 그것을 뒷받침 했다.

푸에블로호가 비로소 위험을 감지한 것은 주위에 갑자기 배들이 많아진 오전 11시 35분 쯤이었다. 더 이상 감시받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보고한지 채 1시간도 안된 때였다. 그로부터 25분 뒤인 23일 정오, 사흘 전 공해상에서 만났던 북한 구축함 35호(SC-35)가 나타나 항복을 요구했다. 푸에블로호는 ‘이곳은 공해상’이라고 응답했다. 실제로 그 지점은 북한 영토로부터 16마일 떨어진 지점으로 공해상이 명백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푸에블로호의 약점을 간파하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쳤다.

그러더니 오후 1시 15분부터 수 분 사이에 초계함 3척이 더 나타났고 미그기 2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1시 26분 북한이 발포하겠다며 총을 쏴대더니 1시 28분 푸에블로호에 강제로 승선하겠다고 선언했다. 푸에블로호는 발포 사실 등을 본부에 긴급보고하고 일부 무전기와 비밀문서 파기에 나섰다. 그러나 파기라는 것이 도끼로 무전기와 첩보장비를 부수고 일부 비밀문서를 불태우는 수준이어서 비밀문서의 90%, 약 8000통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북한 수중에 넘어갔다.

 

푸에블로호, 나포되기 전 비밀문서 파기 못해

푸에블로호는 곧 ‘원산항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급박한 보고를 무전으로 쳤다. ‘북한의 발포로 3명이 부상당했으며 그중 1명은 다리가 날라갔다. 무기는 한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다’는 보고였다. 훗날 조사에 따르면 당시 푸에블로호에는 무기가 변변치 않았다. 승무원이 83명인데 50구경 기관총 2정, 톰슨 반자동소총이 10정 등 총 20정에 불과한 사실상 비무장상태였다.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으로 끌려간 것은 일몰 전인 오후 5시였다.

푸에블로호 승조원들. 당시 북한 관영매체가 공개한 사진

 

푸에블로호의 무전으로 피랍 사실을 알게된 미 공군은 오후 2시 48분 오키나와 카데나 공군기지에 대기중이던 전투기에 한국의 오산으로 출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출격은 즉시 이뤄지지 않다가 오후 4시 11분에야 출격했다. 전투기는 일몰 전에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너무 늦어 효과적으로 푸에블로호를 지원할 수 있는 작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실상 별 효력이 없는 출격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출격이 늦어진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출격명령을 받았던 12대의 전투기 모두 핵폭탄을 장착하고 있어 이를 재래무기로 교체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당시 오산기지에도 F4팬텀기 3대가 대기 중이었으나 2대는 고장이 나서 부품을 기다리던 중이었고, 1대는 핵무기가 장착되어 있어 출격할 수 없었다. 우리 정부가 미국 측으로부터 나포 사실을 공식통보받은 것은 푸에블로호가 원산항에 도착하고 1시간 30분 뒤인 오후 6시30분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군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북한

푸에블로호 나포 후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팽팽하게 전개되었다. 북한은 미군이 자국의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은 원산항으로부터 40㎞ 지점의 공해상에서 납치되었다며 북한 측의 불법적인 군사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국이 아무리 군사 초강대국이라고 하더라도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북한이었다.

사건 발생 후 미국은 푸에블로호 납치를 ‘전쟁행위’로 규정해 때마침 일본에 와 있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1월 24일 밤 원산 앞바다로 급파했다. 25일에는 미 전투기 2개 대대가 한국으로 날아왔고 26일에는 존슨 대통령이 공・해군 예비역 소집령을 내렸다. 우리 군도 전군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출동한 미 항모 엔터프라이즈호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비록 고문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푸에블로호 함장이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승무원 공동의 이름으로 영해 침범을 사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미국을 곤혹스럽게 했다. 1월 27일에는 “미국이 무력행위를 한다면 푸에플로호 승무원들을 모조리 처형할 수밖에 없다”는 북한 최고사령부의 경고가 발표되었다.

미국은 다각도로 북한을 압박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푸에블로호 승무원과 맞바꾸기 위해 북한 선박을 나포한다거나 원산 공군기지 등을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심지어 비무장지대 북쪽 10㎞ 지점에 있는 북한 6사단 본부를 점령․파괴하는 방안까지 검토했다. 당시 CIA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기를 출격시켜 북한 전역, 특히 군사기지에 대한 정밀사진을 촬영한 것도 바로 북한공격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박정희 대통령, 미북 회담 반대 입장 고수

문제는 베트남전과 더불어 2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 없다는 현실적 한계였다. 당시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그 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고 미국인들은 전쟁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푸에블로호 나포 8일 뒤인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의 이른바 ‘테트(구정) 공세’로 미 전역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남베트남의 100여 개 도시와 마을들이 8만여 명의 베트콩으로부터 동시 공격을 받은 것이다. 민간복장을 한 수천 명의 게릴라들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해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 남베트남 정규군 사령부, 대통령궁 등 주요 시설을 잇달아 공격했다.

북베트남의 구정 공세로 화염에 휩싸여 있는 사이공

 

이런 마당에 미국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울며 겨자먹기 식의 협상뿐이었다. 2월 2일, 미․북 간의 비밀회담이 판문점에서 시작되면서 길고 지루한 협상의 서막이 올랐다. 인질을 붙잡고 있는 북한의 요구는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하라”는 것이었다.

그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회담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우리가 당한 1·21사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국의 푸에블로호 사건만 해결하려는 데 급급해 하는 미국이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2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군사 응징을 강하게 요구했다. 나아가 한국만의 독자적인 무력 보복을 천명하며 미국의 존슨 행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안보 및 방위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한다는 요지의 친서를 보내 박 대통령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1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한미방위조약 개정 등을 얻어내는 실리를 취했다.

 

미국, 결국에는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서 정탐행위를 했다”고 시인

미·북 간의 협상은 북한이 첫날부터 “미국이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진전을 보지못하고 11개월 동안 28차례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양측이 석방 합의 문건에 서명한 것은 12월 23일 오전 9시였다. 82명의 생존 승무원과 1구의 시신은 서명 후 바로 미 측에 인계되었다. 사건 발생 336일 만이었다.

판문점에서 풀려나 미군 헬기에 오르는 푸에블로호 승무원들

 

미국은 문건을 통해 “미국 함선이 북한의 영해에 들어가 정탐행위를 한 데 대하여 사과하고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북한의 영해에 들어가지 않도록 할 것을 다짐한다”며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에서 군사적・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행위를 했다”고 시인했다.

서명에 앞서 미국은 북한과 사전에 합의한 대로 “영해 침범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승무원 석방을 위해 문건에 서명한다”는 옹색한 구두 변명의 기회를 가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이날 북한 중앙방송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 인민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돌려주지 않았다. 원산항에 보관하다가 1999년 화물선으로 가장해 남한 주변의 공해를 9일간이나 돌아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겨 일반에 전시 중이다. 그곳은 사건이 일어나기 122년 전인 1886년 조선의 개방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쇄국정책에 의해 격침된 곳이었다.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셔먼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 당시 노동신문의 기사내용이다.

북한 주민을 상대로 미국 첩보활동의 실체적 교육을 알리기 위한 선전물로 활용되고 있는 푸에블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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