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유관순 열사의 殉國(순국) 100주년… 일제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18살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산화한 그의 불꽃같은 삶을 기리며

↑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카드

 

by 김지지

 

유관순 열사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순국한지 어느덧 100년이 되었다. 열사가 어떻게 일제에 저항하다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산화했는지 그 짧은 인생을 살펴본다.

 

유관순 가문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는 3대에 걸쳐 9명

유관순(1902~1920)은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이 기독교 감리교에 입교한 개화 인사였으며 향촌 유지들과 함께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선 계몽운동가였다. 이런 부친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키우던 중, 1915년 봄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으로 입학했다. 이후 이화학당 옆의 정동교회를 다니며 민족혼을 불어넣는 손정도 목사의 애국적인 설교에 영향을 받았다.

유관순 열사 생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 있다.

 

1918년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보통고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유관순은 1919년 2월 학생들 사이에 3·1 운동이 모색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화학당 내 비밀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3월 1일 파고다공원을 출발한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는 것을 보고 5명의 동료 학생과 함께 외국인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했다.

3월 5일에는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가했는데 서울 지역의 학생 상당수와 고종의 인산(3.3)을 마치고 귀향하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한 시위 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유관순 역시 종로 6가에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종로 거리의 3·1만세운동

 

이후에도 만세 시위운동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조선총독부가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임시 휴교령을 선포했다. 유관순은 서울에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어 이화학당에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미 전국적으로 뜨겁게 달궈진 만세 시위운동은 고향에서도 비등점을 향해 끓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이곳저곳 뛰어다녀

고향 인근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는 3월 14일 목천읍의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명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거리로 뛰쳐나간 시위행진이었다. 3월 20일에는 광명보통학교 교사·학생들과 입장면 시장에 모여 있는 700명의 농민과 상인이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28일에는 입장면의 광산 노동자 200명이 시위운동을 일으켜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2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다. 3월 29일에도 천안 읍내에서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3월 30일에는 수백 명의 풍세면 농민이 횃불 시위를 전개했다.

이화학당 재학 시절의 유관순(뒷줄 오른쪽 끝),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사촌언니 유예도, 중앙은 지도교사였던 박인덕

 

유관순은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 운동 소식을 전하고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3월 16일 주일 밤 예배가 끝났을 때는 교회에 남아 만세 시위운동을 논의하는 유중권, 유중무, 조인원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에게 서울의 3·1 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유중권은 유관순 아버지이고 유중무는 유관순의 작은아버지였으며 조인원은 독립운동가 조병옥의 부친이자 조순형 전 의원의 조부였다.

유지들은 그 자리에서 4월 1일 이동면(현재의 병천면) 아우내 장날 때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날이 음력으로 3월 1일이어서 3·1 운동의 뜻을 살리자는 취지였다. 인근의 면과 촌을 연결하는 연락원은 유관순과 유예도(사촌언니)가 맡았다. 유관순은 서울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고 틈나는 대로 태극기도 만들었다. 거사를 하루 앞둔 3월 31일에는 지령리 뒷산 매봉에서 이튿날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사방의 산에서도 20여 개의 횃불이 그믐날 밤하늘을 밝혔다.

당시를 기념하기 위한 매봉의 봉화대와 봉화탑

 

유관순 부모도 일제에 저항하다 총칼에 찔려 숨져

마침내 다가온 4월 1일,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 어귀에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독립선언식은 오후 1시쯤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것으로 거행되었다. 이윽고 조인원·유중권·유중무·유관순 등이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 뒤를 따라 3,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군중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고 있을 때 일제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둘렀다. 분노한 시위대는 장터 주변에 있는 헌병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고 유리창을 깨뜨렸다.

헌병은 또다시 총검을 휘둘렀다. 결국 유관순의 부친은 총검에 찔려 숨졌고 어머니는 남편의 죽음에 분노하며 항의하다 역시 총칼에 희생되었다. 유관순도 총검에 찔려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채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아우내 장터 시위에서만 19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했다. 나중에 옥사하거나 고문으로 순국한 사람도 29명이나 되었다.

헌병은 무차별 총격으로 군중을 해산한 뒤 그날 저녁 유관순·조인원·유중무 등을 잡아갔다.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던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 역시 같은 날 영명학교에서 시위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할아버지는 아들과 며느리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2개월 보름 뒤 숨졌다. 유관순의 집안은 이렇게 풍비박산 났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내 ‘그날의 함성’ 조각 (출처 천안시)

 

옥중에서도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 전개

유관순은 5월 9일 공주지법에서 조인원·유중무와 함께 5년형을, 6월 30일 경성복심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상고한 것과 달리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아 3년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기록된 수형자 기록표를 보면 유관순의 신장은 5자 6치, 즉 1자를 30.3㎝로 환산하면 169.7㎝의 큰 키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유관순은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도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20년 4월 일본 정부가 왕세제 영친왕 이은의 결혼을 경축하는 의미로 한국인 정치범에 사면령을 내려 유관순의 형량은 3년에서 반으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머지않아 풀려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한 방광 파열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에서 18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일제는 순국 후에도 가족을 제대로 수소문하지 않아 순국 후 보름이나 지난 10월 12일에야 이화학당에 시신을 인도했다. 그동안 가장(假葬)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시신은 부패할대로 부패해 있었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 중일 때 모습(왼쪽)과 표준 영정

 

열사가 세상에 알려진 건 해방 후

유관순의 장례식은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거행되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될 때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무덤이 사라지고 말았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조성한 묘는 혼백만 모신 초혼묘다.

그런데 유관순의 존재는 일제하에서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하 발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도 유관순 관련 기사는 한 건도 검색되지 않는다.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진 건 해방 후인 1945년 신봉조 이화여고 교장, 박인덕 이화학당 교사가 해방 후 회고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박인덕이 유관순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3·1 운동 때 학생을 선동한 교사로 지목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서 제자 유관순을 만나게 되었고 옥중에서도 죽음을 불사한 유관순의 강렬한 투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도 2014년 검인정 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일부에서 유관순을 싣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어 뒤늦게 국내 학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교과서를 집필한 측은 “유관순이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친일파란 박인덕 교사와 이화학당에서 1930년대 후반 교장을 했던 신봉조를 지칭한다. 즉 이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위를 감추기 위해 유관순의 행적을 과장해 만들어냈기 때문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허수아비를 아무 검증과 비판 없이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집필자들을 비판하는 측은 “두 사람이 일제 말기에 친일 행위를 한 것은 맞지만 친일 행적이 있는 이광수가 ‘백범 일지’를 썼다고 해서 김구를 교과서에서 빼야 하느냐”며 반문한다. 그리고 1947년 9월 유관순기념사업회가 발족했을 때 조인원의 아들 조병옥과 후일 문교부 장관이 될 오천석이 회장을 맡고 서재필·이승만·김구·이시영·김규식·최현배 등이 고문으로 참여한 것으로 미루어 친일파가 만들어낸 영웅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유관순 가문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는 3대에 걸쳐 9명이나 된다. 유관순과 부모님은 물론 숙부 유중무, 오빠 유우석, 사촌언니 유예도, 올케 조화벽, 조카 유제경, 이종조카 한필동이 그들이다. 2015년 진수된 잠수함을 유관순함으로 명명했는데 여성의 이름을 해군 함정 이름으로 채택한 것은 해군 창설 이래 처음이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 오른쪽 동상은 유관순 열사가 만세 부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출처 천안시)

 

 

☞ 유관순 노래 (1952년 강소천 작사, 나운영 작곡)

<1절>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속에 갇혔어도 만세부르다 푸른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2절>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유관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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