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외교부가 30년 전 외교 기밀문서를 해제하면서 임종석 기획 ‘임수경의 방북’은 빼 논란이라는데… 임수경 방북 어떻게 이뤄졌나

↑  평양에서 연설하고 있는 임수경

 

by 김지지

 

외교부는 1994년부터 매년 30년이 경과된 기밀문서를 공개해왔다. 국민 알 권리를 위해 일부 극비 문서를 제외하고 한·일 수교, 김대중 납치, 아웅산 테러 등 주요 현대사를 둘러싼 외교 내막을 숨기지 않고 공개했다. 이에 따라 2020년 3월 31일에도, 30년 전 외교 기밀문서 1577권(24만여쪽)을 전면 공개했다. 그런데 당시 최대 현안이던 ‘임수경 방북’ 관련 내용이 거의 통째로 빠져 논란이 되고 있다. 임수경의 방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본다.

 

임수경, 서울 출생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구속 전력이 없어 방북에는 적격

“백만 학도 여러분, 전대협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1989년 6월 30일 오후 1시 30분, 서울을 출발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열흘 만에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린 21살의 임수경(1968~ )이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임수경이 평양에서 북 주민들을 향해 손을 들고 있는 모습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학년생 임수경이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의 지시를 받고 서울을 떠난 것은 6월 21일이었다. 떠나던 그날 아침까지도 임수경은 망설였다. 서울을 떠나 도쿄에 머물 때도 전대협의 준비 부족으로 언제 어떻게 방북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도쿄에서 1주일을 혼자 보낸 임수경은 뒤늦은 전대협의 결정에 따라 전혀 예상치 못한 도쿄 → 서베를린 → 동베를린 코스를 밟아 평양 땅을 밟았다. 순안비행장은 수많은 군중으로 들어차 있었고,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북한 주민의 열렬한 환영이 이어졌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제3기 의장인 임종석이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축전)에 참가하기로 공식 선언한 것은 그해 1월이었다. 당초 정부는 1988년 12월 북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의 초청장을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전대협에 전달할 만큼 평양축전 참가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그해 3월 황석영(20일)과 문익환(25일)이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고, 1년 전 8월 서경원 의원이 방북한 사실이 그해 6월에 알려져 공안정국 한파가 불어닥치면서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를 허가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문익환과 황석영의 방북. 왼쪽은 문익환과 김일성이 포옹하는 모습이고. 오른쪽은 비행장 환영식에서 황석영이 북한 화동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는 모습

 

전대협은 은밀히 방북을 추진했고 적임자로 임수경을 꼽았다. 임수경은 서울 출생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된 전력이 없는 데다 여권을 가지고 있어 언제라도 출국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공안 한파 속에서 오히려 탄압의 빌미만 제공할 것이라는 의견이 조직 내부에서 제기되었으나 전대협 지도부는 강행했다. 당시 전대협 의장은 한양대 임종석이었다.

 

북한에서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임수경의 행보는 역설

평양축전에서 임수경은 영웅이었고 ‘통일의 꽃’이었다. 그녀의 당찬 언행은 남과 북 모두에 충격과 흥분과 감동을 던져주었다. 북한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임수경에게 열광했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가 북녘 곳곳에 울려 퍼졌다.

임수경이 북한 학생들과 손을 잡고 율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않은 결과가 나타나 북한 당국을 곤혹스럽게 했다. 맑고 해사한 얼굴에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나 거침없이 말을 하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임수경은 그동안 북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미 제국주의에 신음하며 헐벗고 굶주리는 그런 동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역설이었다.

임수경은 서울을 출발할 때 다짐한 원칙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전대협의 축전 참가 방침에 벗어나는 행위나 사전에 예정되지 않은 행사는 단호하게 거절, 한때 북한 안내인들과 서먹해질 때도 있었다. 김일성은 7월 2일 평양축전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1~2분 정도 만난 게 전부였다.

김일성을 만난 임수경

 

‘반제 연대·평화·친선’을 슬로건으로 1989년 7월 1일부터 7월 8일까지 열린 평양축전에는 전 세계 120개국에서 1만 7000여 명의 청년학생이 참가해 대성황을 이뤘다. 북한이 개최한 최대 규모의 국제적 행사로 축전 기간 내내 평양은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다.

축전 폐막일인 7월 8일 임수경은 남측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북한 학생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하나의 조국, 하나의 민족이 타의에 의해 겪어온 45년의 분열은 민족 비극의 45년이었다’로 시작하는 이 공동선언을 임수경은 자신이 평양축전에 참가해 거둔 최대 성과로 꼽는다. 축전이 폐막된 후에도 북한에 머물던 임수경은 6·25 참전국 16개국을 포함해 5대륙 30여개국에서 온 평화운동가 300여명과 함께 7월 20일부터 1주일간 진행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제3국을 통해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임수경은 서울을 떠날 때 반드시 판문점을 넘어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했다. 7월 27일 임수경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으려 했으나 44년간 굳게 닫힌 분단의 장벽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판문점 북쪽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정에 따라 임수경의 무사 귀국을 위해 도쿄와 북경을 경유해 7월 26일 북한에 도착한 문규현 신부가 와 있었다.

문규현은 1975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한 미 영주권 소지자였다. 그는 두 달 전 이미 북한을 방문해 평양 장충성당에서 통일 염원 미사를 봉헌한 바 있다. 임수경의 귀환은 예상대로 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의 동의가 없는 한 판문점 통과를 허용할 수 없다는 유엔사령부의 뜻에 따라 귀환 길이 막힌 것이다.

임수경이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는 모습

 

북한도 제3국을 통한 귀환을 권유했다. 임수경은 “제3국을 통해 돌아갈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며 단식에 돌입했다. 100여 명의 평축 참가자들도 단식에 동조했다. 결국 북한은 이 고집 센 남쪽의 처녀를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해 임수경의 판문점 귀환을 허락했다. 8월 15일 오후 2시 20분 태극기를 몸에 두른 임수경과 문규현이 손을 꼭 붙잡은 채 군사분계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오후 2시 22분 마침내 높이 7㎝, 너비 40㎝의 시멘트 장벽을 넘었다.

분단 이후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최초의 민간인으로 기록된 임수경을 기다린 것은 차가운 감옥이었다. 목적 수행 및 잠입 탈출 등 13가지 죄목으로 2심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이 선고되었다. 임수경은 3년 4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1992년 12월 특별 가석방되었다.

임수경은 첫 방북 후 12년이 지난 2001년 8월 15일 또다시 평양 땅을 밟았다. 이번에는 정부의 승인을 받은 합법적인 방북이었다. 임수경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 개·폐막식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방북 때 우리 정부와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 일로 북쪽 안내원과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에도 임수경은 정부의 승인을 받고 수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그렇게 몇 번을 가니 북한도 그를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를 보였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이 1993년 5월 감옥에서 석방된 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임수경의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임종석 전대협 의장은 임수경의 밀입북 사건을 주도한 것 말고도 그해 2월 여의도 농민시위를 배후조종한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 그러나 임종석은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며 신출귀몰하게 도주하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다. 심지어 수배 기간 중 공식 비공식 기자회견을 11차례나 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이런 그에게 홍길동에서 따온 ‘임길동’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임종석은 운동권들 사이에서 아이돌 급 인기를 누렸다. 대중 연설을 워낙 잘하고 외모도 출중해 전대협이 주도한 집회에 수배상태에 있던 임종석이 깜짝 출연해 연설을 하면 운동권이 아닌 학생들까지 몰려가 구경했을 정도였다. 그가 검거된 것은 학생운동사장 최장의 수배 기간 309일 만인 1989년 12월이었다. 이후 최종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만기출소를 1년 7개월 가량 남긴 1993년 5월 가석방 조치로 출감했다.

 

전대협이 다시 파견을 시도한 두 대학생은 북한 체제에 환멸 느껴 포기

임수경이 방북하고 2년 뒤인 1991년, 전대협은 또다시 평양의 8·15 청년학생 통일 대축전에 박성희(경희대)와 성용승(건국대)을 파견했다. 그해 6월 베를린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한동안 베를린에 머물다 그해 8월 5일 북한의 평양으로 가 통일대축전에 참석한 후 판문점으로 돌아오지 않고 1991년 10월 베를린으로 되돌아갔다. 전대협으로부터 북측 학생 대표들과 함께 ‘범청학련’ 조직을 독일에 만들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박성희(왼쪽)와 성용승

 

하지만 박성희와 성용승은 베를린에 체류하면서 갈등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북측 대표가 대등하게 대화를 하지 않고, 회의 중에 탁자를 뒤엎는다든지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합의를 해놓은 사안도 북으로부터 지령이 떨어지면 뒤집는 일이 다반사였다. 두 사람은 북한 체제의 본질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전대협 본부에 “북한은 완전히 독재 사회다. 민주주의를 전혀 모른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문화 차이 때문이니 좀 지나면 좋아진다”며 “참고 견디라”라고 달랬다.

두 사람은 결국 1996년 4월 범청학련 활동을 중단하고 1998년 8월 7일 귀국했다. 준법서약서를 제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다짐한 뒤 열흘 후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은 더 이상 통일운동의 대안이 아니다”며 “폭력적이고 친북 일변도로 치닫고 있는 한총련은 즉시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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