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패망 후 이승만 박사 귀국… 김구 임정 주석은 11월 23일 귀국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귀국하려면 미 군정의 허가를 받아야했다. 미 군정이 자신들만이 38선 이남의 유일한 합법적 통치기구이고 기존의 모든 정치세력들은 대표성이 없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해외의 충칭(中京) 임시정부와 국내의 조선인민공화국도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승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10월 4일 군용기편으로 워싱턴을 출발,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괌을 거쳐 10월 12일 일본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4일간 체류하며 하지 미 군정장관과 회담하고 맥아더와 회동한 그는 1945년 10월 16일 오후 5시 군복을 입고 개인자격으로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승만의 귀국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이튿날 오전 10시경이었다. 신문들은 호외를 뿌렸고 라디오는 오후 7시30분 첫 방송을 내보낸 후 1주일동안 계속 이 사실을 알렸다.

이승만과의 제휴가 유리하다고 판단했는지 좌우익을 막론한 50여개 단체가 이승만을 찾았다. 17일 정오경에는 송진우·장덕수 등 한민당 간부들이 그가 묶고 있는 조선호텔을 방문하고, 오후 2시경에는 여운형·허헌 등 이승만을 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했던 좌익들이 그를 찾았다. 하지만 국내에 정치기반이 약했던 이승만은 이들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부하면서 정국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개인자격으로 여의도 군용비행장에 내린 것은 11월 23일 오후 4시경이었다. 미 국무부가 요구한 “군정이 끝날 때까지 군정 당국의 법과 규칙을 준수할 것에 동의한다”는 서약에 서명을 하고나서였다. 임정이 스스로 ‘정부’임을 내세우고 있어 남한 통치에 걸림돌이 될 것으로 경계한 미군정으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임정의 귀국을 맞는 미군정의 태도는 이승만 때와 달리 냉랭했다. 비행장에는 장갑차 1대만 대기하고 있었고 김구 일행은 도착 성명서 없이 장갑차에 실려 광산왕 최창학이 바친 죽첨장(후에 경교장)으로 직행했다.

미군정의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은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국내에 알려지면서였다. 백범이 미군정의 의도와 배치된 신탁통치 반대의 기치를 든 것이다. 김구는 반탁회의를 소집해 임정의 즉각 승인을 요구하며 항의 파업을 전개할 것을 발표했다. 이를 ‘김구의 쿠데타’로 규정한 미 군정은 김구에게 위협을 가하며 김구 스스로 파업중단을 알리는 라디오 연설을 하게 했다. 이 사건 후 미군정은 임정 세력에 대한 기대를 모두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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