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맨발의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 사망

20세기 초까지 무용은 우아한 아름다움과 절제된 정서 표현을 당연시했다. 때문에 일부 열정적인 무용가들은 고전적인 무용형식에 답답함을 느꼈다. 미국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못하고 독학으로 무용을 연구해온 이사도라 덩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형식을 무시했고 자기 방식의 춤을 추구했다. 21세 때 가진 데뷔 무대에서는 신체를 과감하게 노출시켜 점잖은 사교계 부인이 자리를 뜨는 일도 있었다. 파격은 이사도라를 유명하게만 했을 뿐 사람들을 이해시키지는 못했다.

1899년 런던으로 이주해서는 그리스풍의 느슨한 튜닉을 걸치고 맨발로 춤을 췄다. 200년 가까이 무용계를 지배해온 토슈즈를 벗어버린 것이다. 유럽은 온몸으로 강렬한 정서를 표현해내는 ‘맨발의 이사도라’에 열광했다. 관중이 몰렸고 찬사가 쏟아졌다. 1905년 러시아를 찾았을 때 우연히 목격한 ‘피의 일요일’ 사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는 맹세했다. “압제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노라”고. 1921년 다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러시아가 손짓하자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열일곱 살 연하의 러시아 시인과도 결혼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 1922년 미국 순회여행길에 나섰으나 조국은 이미 소련사람이 되어버린 이사도라를 냉대했다.

언론은 춤보다 스캔들을 추적하는 데 열심이었다. ‘소련의 동조자’ ‘볼셰비키의 화냥년’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이사도라는 무대 위에서 혁명적 열변을 토해냈고 “나체는 진실”이라며 가슴을 드러냈다. 결국 시민권을 박탈당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미국이여 안녕. 다시는 너를 찾지 않으리!” 떠나면서 남긴 말처럼 그는 다시는 미국을 찾지 않았고 1927년 9월 14일 프랑스에서 자동차 바퀴에 스카프가 걸려 질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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