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미국 수정헌법 제19조 발효… 美 여성에 투표권 부여

1868년 발효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14조 제1항은 이렇다. ‘어떤 주도 합중국 시민의 특권과 면책권을 박탈하는 법률을 제정하거나 실시할 수 없다.’ 수전 앤터니는 법정에서 이 수정헌법 제14조를 근거로 여성에게도 시민의 특권인 투표권을 부여하라고 요구했으나, 법원은 ‘14조는 생명, 자유, 재산 그리고 공정한 재판의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만을 인정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앤터니는 다시 ‘합중국이나 각 주는 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을 인종, 피부색 또는 과거의 신분을 이유로 거부하거나 제한하지 못한다’(1870년 발효)는 수정헌법 제15조 제1항을 내세워 참정권을 요구했다. 남성들은 그러나 ‘여성의 투표를 거부하거나 제한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없으므로 투표권을 내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미국 남성들 눈에 분명 여성은 인간으로, 흑인은 노예로 비쳤을 텐데도 남성들은 흑인에게까지 주어진 투표권을 여성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흑인의 투표권도 명목상에 불과했다.

그러자 수전 앤터니는 1872년 11월 1일, 3명의 여자형제들과 밧줄로 서로를 묶고 뉴욕주 로체스터 선거사무소에 나타나 유권자 등록을 요구했다. 담당 공무원이 “여성에겐 투표권이 없다”고 설명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앤터니가 수정헌법 제14조를 제시해도 공무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앤터니는 “시민으로서의 내 권리를 부정한다면 나는 당신들을 고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로 시민권에 대해 부당한 거부를 하면 처벌을 받았다. 그렇다고 위법한 투표를 허가해도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공무원은 훗날 이렇게 말했다. “페스트냐 콜레라냐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 고발당하게 되어있습니다.” 공무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격렬한 논쟁 끝에 앤터니를 선거인으로 등록시켰다는 이유로 훗날 공무원도 재판에 회부됐다.

나흘 뒤인 11월 5일, 앤터니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었을 때 “여자가 투표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흥분한 한 남성이 ‘불법 선거’라며 고발장을 냈고 그녀는 곧 불구속 입건됐다. 앤터니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합중국의 헌법을 위반해 재판을 받아야 했으나 자신을 변호할 이보다 멋진 더 광장이 있을까 싶어 내심 미소를 지었다. 앤터니의 항변에도 법원이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자 다음날 한 신문은 ‘승리자는 앤터니다. 그녀는 선거를 했고 미국 헌법은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그녀는 벌금을 내지 않았다. 또 아무도 벌금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처럼 여성의 한 표는 거저 쥐어지지 않았다. 오랜 투쟁의 산물이었다. 문명국을 자처하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여성의 투표권은 194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실현됐고, 심지어 스위스 여성은 1971년까지도 한 표를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과 영국 여성들은 오랜 기간 여성참정권을 위해 맨몸으로 싸워왔으나 뉴질랜드(1893년), 호주(1902년), 핀란드(1906년) 등의 여성에 비해 투표권 행사가 늦었다. 남성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니 여성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피켓시위와 단식투쟁을 벌이다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었다. 1890년 와이오밍주를 시작으로 1918년까지 콜로라도, 유타 등 15개주가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다. 남성 의원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1차 대전 때 전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의 역할을 인정해야 하는 데다, 1918년 가을선거 때 여성들이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남성의원들에 대해 집단적으로 반대시위를 벌인 것이 주효한 것이다. ‘합중국 시민의 투표권은 성별을 이유로 거부되거나 제한되지 아니한다’는 수정헌법 제19조는 1919년 5월과 6월, 각각 하원·상원을 통과한 뒤 각 주의 비준을 기다렸다. 1920년 8월 18일 테네시주의회가 헌법 개정에 필요한 36번째 주로 수정헌법을 비준함으로써 멀고 험했던 여성들의 투쟁사도 막을 내렸다. 8월 26일 국무장관이 서명하고 연방헌법 조항으로 공표한 것은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한 기자는 제19조를 ‘수전 앤터니 수정헌법’이라고 불렀다. 100년이 지난 1979년, 미 정부는 앤터니의 초상을 1달러짜리 동전에 넣어 평생 동안 여성참정권 쟁취를 위해 싸워온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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