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마리아 칼라스,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 데뷔

한 오페라 연출가는 “칼라스 이전(Before Callas)은 오페라 역사에서 기원전(BC)”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기준하면 1947년은 BC와 그 이후를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 마리아 칼라스가 이탈리아 오페라 무대에 입성함으로써 무명의 설움을 떨쳐버린 것은 1947년이다. 대부호이자 매니저였던 남편 메네기니를 만난 것도 같은 해였다.

칼라스는 1923년 뉴욕에서 그리스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노래에는 재능이 있었으나 지독한 근시에 뚱뚱하기까지 해 주목을 끌진 못했다. 딸을 오페라 가수로 키우겠다는 어머니의 집념은 13세의 칼라스를 그리스로 이끌었다. 1941년 그리스에서 데뷔했으나 여전히 관심을 끌지 못하자 1945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오페라 무대를 두드렸다. 그러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힘들게 따낸 계약도 기획사의 도산으로 물거품이 되는 등 하는 일마다 순탄치 않았다. 그때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1947년 8월 2일에 있을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 음악제의 ‘라 조콘다’에 출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진정한 이력의 시작이었다.

칼라스에게 남편과의 결혼(1949년 4월) 후 10여년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풍부한 성량과 아름다운 목소리, 무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에 남편의 외조까지 더해져 칼라스는 ‘디바(여신)’라는 최고의 찬사를 들으며 세계 음악 애호가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1959년 7월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가 칼라스 부부를 그의 유람선에 초대하면서 칼라스의 인생행로에는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 여행이 끝나갈 즈음 칼라스와 오나시스는 연인이 되었고,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파국의 운명을 맞았다. 사랑에 빠진 칼라스는 점점 무대보다는 오나시스의 상류층 파티에 빠져들었고 자신의 공연 스케줄보다는 오나시스의 일정에 관심을 보였다.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굳게 믿고 있던 어느 날 칼라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결혼(1968년 10월) 소식이었다. 마음은 황폐해졌고 목소리도 전성기 때와 달랐다. 공연도 멀리했다. 여전히 결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던 1975년, 오나시스의 죽음이 전해졌다. 결국 생의 의욕을 모두 상실한 칼라스는 파리에서 은둔하다 1977년 9월 16일 54년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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