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둔황 석굴사원 17호굴 발견

둔황(敦煌)은 한대(漢代) 이래로 중국에서 서방으로 나가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육로를 이용하는 한, 나가든 들어오든 여행자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했다. 여행자들은 실크로드로 떠나기에 앞서 혹여 만날지 모를 악귀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기도할 곳을 찾았고, 이를 위해 둔황 석굴사원이 만들어졌다. 석굴사원은 한때 1000여 개에 달할 만큼 번성했으나 지금은 492개만 남아있고 이 가운데서도 각종 고문서가 발견된 17호굴(장경동·藏經洞)이 가장 유명하다.

100여 년 전, 사실상 방치되어 있는 둔황 석굴사원의 모래나 먼지를 치우며 일상을 보내는 왕위엔루(王圓籙)라는 승려가 있었다. 1900년 6월 22일, 석굴(16호) 벽의 갈라진 틈이 갑자기 승려의 눈에 들어왔고 승려는 벽을 파들어갔다. 순간 900년 전의 타임캡슐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방이 3m 정도인 밀폐된 공간에서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각종 고문서와 그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청 왕조가 존폐를 둘러싸고 내외적으로 갈등을 벌이고 있던 때라 누구도 변방의 한 석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승려만이 사실상의 모든 관리권을 행사하며 수호자를 자처했다.

1907년 3월,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였던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중국의 한 학자가 탄식했던 “둔황은 우리나라 상심(傷心)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스타인은 단돈 130파운드로 승려를 꼬드겨 석굴 속에서 1만3000점이나 되는 유물을 빼내 대영박물관으로 옮겼다. 뒤이어 프랑스의 탐험가 폴 벨리오도 90파운드를 주고 다량의 문헌 더미를 프랑스로 빼냈다.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이때 프랑스로 쓸려나갔다. 이후에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600여 점의 경전을 가져갔고, 미국의 랭던 워너는 파손을 막는다는 핑계로 10여 개의 벽화를 떼내 미국으로 가져갔다. 1930년대에는 유물이 베이징으로 옮겨지는 중에도 상당량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오늘날 서양은 스타인과 펠리오를 중국 연구에 크게 기여한 ‘고고학적 탐험가’로 추앙하고 있으나 중국인은 이들을 가리켜 “학자의 탈을 쓰고서 우리의 역사를 강탈해간 파렴치한 투기꾼”이라고 한다. 이에 “우리가 가져가지 않았으면 그 혼란스런 상황에서 유물이 온전했겠냐”는 강변이 현재 서양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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