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영화배우 잉그리드 버그먼,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재혼

“이탈리아어로는 ‘Ti Amo(사랑해요)’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잉그리드 버그먼(1915~1982)은 하늘이 준 재능과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화장을 싫어한 무공해 미인이었으며 매사에 당당했다. 스웨덴에서 태어나 18살이던 1933년 왕립연기학교에서 연기를 배워 영화배우가 되었다. 22살 때인 1937년 결혼하고 이듬해 딸을 낳았다. 엄마가 된 후 “왜 여자배우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느냐”고 세상에 물었다. 요즘 같으면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만 해도 ‘인간 선언’으로 불릴 만큼 반향이 컸다. 버그먼은 이렇게 매사에 당당했다.

버그먼은 1936년 영화 ‘별리’에 출연, 세계 영화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1939년에는 ‘별리’를 할리우드에서 다시 제작하려는 세계적인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초청을 받아 할리우드로 건너가 ‘별리’의 미국판 ‘인터메조’에 출연했다. 뒤이어 출연한 ‘카사블랑카’(1942), ‘무기여 잘 있거라’(1943)로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가스등’(1944)으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꿰차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만인의 연인’으로 활동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른셋의 어느 날 버그먼은 인위적으로 고정된 자신의 모습과 생활에 지루함을 느껴 탈출을 꿈꿨다. 답답했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은 그 무렵 본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1906~1977)의 영화였다. ‘무방비 도시’(1945)와 ‘파이자’(1946) 등 로셀리니의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정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의 영화는 타협을 모르고 전적으로 즉흥성에 의존했다. 시나리오가 없어도 영화를 촬영할 정도로 모든 것을 순간으로부터 끌어내는 즉흥적인 감독이었다.

버그먼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의 영화들을 보고 감탄했어요. 스웨덴의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당신과 함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탈리아어로는 ‘Ti Amo(사랑해요)’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버그먼의 일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역시 기혼자인 로셀리니는 버그먼에게 답장을 쓰면서 즉흥적으로 달려드는 버그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버그먼에게 자신의 영화 ‘스트롬볼리’에 출연해달라고 요청하자 버그먼이 1949년 8월 이탈리아 로마로 달려갔다.

 

하늘이 준 재능과 타고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매사에 당당

당시 그녀는 단지 한 명의 배우가 아니라 대중이 숭배하는 스타였다. 대중은 그녀를 ‘성 메리의 종’(1945)에 나오는 순결한 수녀, 혹은 ‘인터메조’(1939)의 사랑스러운 피아니스트와 동일시하고 ‘성녀 잔다르크’(1948) 속의 성녀처럼 떠받들었다. 버그먼은 로셀리니의 환대와 낭만적인 태도에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이것은 남편과 11살의 딸 그리고 팬들로부터 누리던 온갖 인기와 애정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근처의 작은 화산섬 스트롬볼리에서 영화 촬영이 시작되자 스캔들의 조짐을 감지한 전 세계 기자와 사진기자들이 스트롬볼리로 몰려들었다. 두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어 신문의 연예면을 장식했다. 버그먼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썼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세 사람이 만난 자리에서 로셀리니는 “버그먼이 미국으로 돌아가면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남편은 혼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혼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버그먼이 로셀리니의 아이까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버그먼은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부정한 여인으로 언론에 묘사되었다. 아이는 영화 ‘스트롬볼리’가 1950년 2월 개봉될 무렵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전 남편, 전 부인과 이혼하고 1950년 5월 24일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자 아직 청교도적 윤리가 팽배하던 미국으로부터 “타락한 우상”, “버그먼은 창부”라는 등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상원의원까지 나서 “버그먼이 출연한 영화를 미국에서 상영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제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홍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진 부정한 여인으로 묘사돼

영화 ‘스트롬볼리’는 흥행으로나 예술적으로나 실패했다. 다행히 로마 생활은 버그먼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었고, 할리우드의 허망함을 일깨워 주었다. 1952년 6월에는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 가운데 한 아이가 영화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다.

버그먼과 로셀리니의 다른 영화들까지 연이어 실패하면서 로셀리니와의 행복한 시간은 점점 괴로운 시간으로 변해갔다. 책임감이 투철하고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버그먼은 로셀리니의 심한 변덕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다. 영화의 잇따른 상업적 실패는 버그먼을 지치게 했다. 가정을 유지하려면 돈이 필요했으나 로셀리니는 더 이상 가진 게 없었고 가계를 꾸릴 능력도 없었다.

그때 미국으로부터 버그먼에게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미국식 상업주의를 경멸하는 로셀리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버그먼은 생계를 위해 영화계에 복귀했다. 컴백작 ‘아나스타샤’(1956)는 그녀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미국의 관객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받아들였다.

로셀리니는 아내가 집에서 아이들 곁에 있기만 바랄 뿐 아내가 일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초였다. 그런데도 아내를 이탈리아로 데려오지도, 그렇다고 아내가 하는 일을 인정하지도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결혼 7년 만인 1957년 11월 헤어졌다.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은 그대로 간직했다. 버그먼은 1958년 세 번째 결혼을 하고 1974년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으로 이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말년에는 암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2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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