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댜길레프의 러시아발레단 파리 데뷔

1909년 5월 17일, 러시아발레단의 유럽 첫 발레 공연이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있었다. 관객은 “러시아가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발레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한때 성행했던 발레가 19세기 후반부터 대중 위주의 저속한 예능으로 전락해 인기가 시들해진 탓이었다. 그러나 막이 오른 순간 관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나 파블로바, 바슬라프 니진스키, 미하일 포킨 등 20세기 최고 무용수들의 수준 높은 춤솜씨에 압도당하고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이 그들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무대 뒤 누군가를 떠올렸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1906년 파리에 정착해 음악, 미술, 연극적 요소들을 결합한 새로운 발레를 선보인 세르게이 댜길레프였다. 그러나 이날의 흥행은 적자였다. 그럼에도 빈사상태에 빠진 유럽 발레가 다시 소생하는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흑자였고 대성공이었다. 댜길레프는 이듬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파리 무대에 올려 대호평을 받은 것에 고무되어 1911년 러시아 무용수들을 모아 유럽에서 정식 발레단을 결성했다. 20세기 발레사를 새롭게 쓴 ‘발레 뤼스(Ballet Russe)’였다. ‘발레 뤼스’는 1929년 댜길레프가 죽을 때까지 19년 동안 유럽의 발레를 부흥시키고 발레예술에 혁명을 불러왔다. 공연은 대담하고 현란했으며 안무는 새로웠다.

댜길레프는 예술적 재능은 없었지만 타고난 흥행사였고 공연기획가였다. 그가 발굴한 가장 위대한 음악가는 스트라빈스키였으나 20세기 초의 전위적인 미술, 음악, 무용의 선구자 역시 그의 관심권 안에 있었다. 당대 유명 예술가들도 ‘발레 뤼스’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능력을 제공했다. 피카소, 드렝, 마티스 같은 사람들은 무대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했고 슈트라우스, 드뷔시 같은 음악가들은 발레단을 위해 곡을 썼다.  댜길레프는 때로는 무자비한 전제군주처럼 행동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전설적인 무용수 니진스키라도 거침없이 해고했다. 다만 작품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고, 금전에도 욕심이 없어 죽는 날까지 줄곧 떠돌이 생활에 거의 무일푼이었다. 결국 그의 죽음과 함께 ‘발레 뤼스’도 해체의 길을 걸었지만 단원들은 프랑스로 영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발레 뤼스’의 유산을 계승하며 현대 발레의 주춧돌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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