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국내 첫 시내버스 등장… 여차장도 함께

1928년 4월 22일, 우리나라에도 시내버스 시대가 열렸다. 경성부청(서울시청의 전신)이 일본에서 버스 10대를 들여와 ‘부영(府營)버스’라는 이름으로 서울 도심 운행을 시작한 것이다. 15분마다 시내 3개 노선을 달린 버스에는 14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8명까지 입석할 수 있었다. 전차와 달리 어디서든 손을 들면 태워주는 시내버스의 등장에 일반시민은 물론, 전차 없는 길을 가기 위해 비싼 인력거와 택시를 타야 했던 부유층까지 반겼다. 요금은 정류장에서 정류장까지의 1구간에 7전이나 받아 구간에 관계없이 5전을 받았던 전차에 비해 꽤 비싼 편이었다. 첫날 60원, 1개월 동안 1662원이나 되는 수입을 올리자 당시 조선일보는 ‘버스가 지나친 폭리를 취한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부영버스는 여론에 밀려 이듬해 요금을 5원으로 내렸다.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 ‘버스걸’로 불렸던 여차장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차장이 되려면 16~20세에 산술시험과 면접을 거쳐야 했는데 12명 모집에 75명이 지원하고 59명이 응시해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차장들은 한결같이 아버지의 직업이 없었다고 한다. 직업여성이 거의 없었을 때 여성이 생활에 쫓겨 돈벌이에 나서고 또 경쟁시험을 치른 것을 동아일보는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보도했다.

젊은 아가씨가 겨우 무릎을 덮을 정도의 짧은 플레어 스커트에 가죽 허리띠로 졸라맨 양복저고리를 입고 “바고다 공원입니다” “오라잇! 떠납니다”를 외쳐대는 모습은 당시로서는 진풍경이었다. 총각들이 타고 내리며 쪽지를 건네주기도 했지만 차장들의 기숙사 돌담 위 가시덤불에도 아침이면 데이트를 청하는 연애편지가 하얀 꽃처럼 피어있었다고 한다. 버스회사가 큰 수입을 올린 것과 달리 차장은 85전의 일당을 받는 박봉이었다. 요즘의 버스요금과 단순비교하면 하루 1만원꼴이다. 삥땅(횡령)이 없을 리 없어 한 운수업자는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도로는 차를 갉아먹고 조수는 휘발유를 갉아먹고, 차장은 차비를 갉아먹으니 나는 뭐 먹고 살란 말이냐.”

5년 동안 전차와 운행 경쟁을 벌였으나 1933년 운영권이 전차를 운행하는 경성전기로 넘어가 한동안 전차는 시내, 버스는 주로 교외를 운행하는 이원체제로 운영됐다. 1989년 4월 20일 김포교통 소속 차장들이 마지막으로 그만두면서 차장 없는 버스시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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