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윤동주 일본 감옥에서 옥사

윤동주는 1917년 만주 간도에서 태어나 1938년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시절 산책과 독서로 소일하며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1941년 졸업을 앞두었을 때 윤동주는 시 19편을 묶은 원고를 3부 만들어 대학 은사와 지기 정병욱에게 건네고 자신도 1부를 보관했다. 정병욱은 1943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에게 원고를 부탁했고 어머니는 항아리에 담아 원고를 땅속에 묻었다. 다행히 정병욱이 학병에서 살아 돌아와 윤동주의 원고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48년 2월 정병욱이 보관해온 원고 19편과 유족이 수습한 유고 12편을 합한 31편의 시가 민음사에서 시집으로 묶여나왔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그 뒤 1955년 중판을 내면서 수록작이 93편으로 늘어나고 1976년에는 모두 116편이 시집으로 묶였다. 이처럼 윤동주가 한국의 대표시인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정병욱의 역할이 컸다.

1942년 윤동주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 발을 붙인 곳은 일본 릿교 대학이었으나 군국주의가 판을 치자 한 학기만에 뛰쳐나와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적을 옮겼다. 그러나 1943년 7월 윤동주는 갑작스럽게 송몽규와 함께 체포되었다.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윤동주는 2년, 송몽규는 2년6월의 언도를 받고 후쿠오가 형무소에 갇혔다.

그런데 광복이 6개월도 채 안남았을 때 윤동주의 죽음 소식을 알리는 전보가 간도 집으로 날아들었다. ‘1945년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죽음의 원인은 형무소에서 맞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에 있었다. 윤동주의 부친이 감옥에 갔을 때 조선 청년들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 것이 목격되고 그곳에서 만난 송몽규가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는데, 동주도…”라며 흐느꼈다는 것이다. 결국 송몽규도 3월 10일 눈을 감았다. 윤동주의 시신은 간도 용정 동산에 묻혔다.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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