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5년 선전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 (캔버스에 유채, 136×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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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 찬사 쏟아져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서양화를 거론할 때 이인성(1912~1950)을 비껴갈 수는 없다. 그는 10대 때 성취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의 입선과 특선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20대 초반, 일본 화단에서도 이름을 날리고 23살에 선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거머쥠으로써 단박에 조선 화단의 젊은 주자로 부상했다. 이런 그에게 “선전 최대의 감격”, “근대 화단의 귀재”, “한국의 고갱” 등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1928년 3월, 16살의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집안이 가난한 탓에 상급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대신 디자인 인쇄를 다루는 대구미술사에서 숙식을 하며 생계도 꾸리고 그림도 배웠다. 대구미술사는 도쿄에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대구에서 수채화가로 활동하던 서동진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인성은 16살이던 1928년 10월 개벽사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출품한 수채화 ‘촌락의 풍경’이 특선을 차지해 화가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수채화 ‘그늘’을 선전에 출품, 스승 서동진과 나란히 입선하면서 등단했다. 1930년 5월 ‘겨울 어느 날’로 선전에서 또다시 입선하고 1931년 5월 ‘세모가경’이 처음 특선에 뽑혀 서서히 대구 화단의 자부심으로 떠올랐다.
‘가을 어느 날’, 향토색 미술 논쟁 불러 일으켜
이인성은 대구여고보(1938년 경북고녀로 개칭) 교장이자 고미술 수집가이던 일본인의 도움을 받아 19살이던 193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낮에는 크레용-물감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이인성은 일본에서 서구 미술의 후기인상주의 기법을 익혀 조선의 향토적 서정주의로 승화·토착화시키며 나름의 주체적 화풍으로 소화했다. 그는 일본에서도 빠짐없이 각종 전람회에 출품, 특선이나 입선을 차지했다.
1932년 선전에서는 ‘카이유’가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서는 ‘여름 어느 날’이 입선을 했다. 1933년에도 선전에서 특선을 하고 일본의 제전에서는 입선했다. 1934년 5월 선전에서는 ‘가을 어느 날’이 특선하고 1935년 전일본수채화회전에서는 ‘아리랑 고개’가 최고상을 차지했다. 이렇듯 이인성이 일본에서도 각종 상을 휩쓸자 요미우리신문이 “조선의 천재 소년”이라고 부르며 근황을 전할 정도로 관심과 주목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