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기존 의석 230석이 196석으로 줄어드는 첫 후퇴를 경험하지만 나치당은 여전히 제1당이었고, 이를 발판으로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마침내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힌덴부르크가 명목상 제1인자인 대통령이라고는 하나 그는 86세의 무력한 노인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총리 취임 다음날, 다가오는 3월 5일에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과반수 의석 확보를 목표로 국영 라디오는 하루종일 나치의 선전․선동으로 소란스러웠고, 길거리는 반대파를 향한 나치 돌격대의 집요한 공격으로 어수선했다. 그런데 선거를 일주일 앞둔 1933년 2월 27일, 갑자기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난 시간은 밤 9시. 100여 대의 소방차가 출동했는데도 자정이 지나서야 진화될 만큼 큰 화재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24세의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반 데르 루베는 순순히 자신의 단독 방화를 자백했다. 그런데도 이튿날 경찰은 히틀러의 반대자 4000여 명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히틀러는 방화를 구실로 ‘국민과 국가를 방위하기 위한’ 대통령령을 공포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켰다. 공산당 의원 81명 전원도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
방화사건은 항간의 소문대로 나치의 조작이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히틀러가 반대세력을 탄압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총선 결과 나치당은 44%를 획득해 기대한 만큼의 지지는 얻지 못했다. 그러나 우파인 국가인민당과의 연립으로 3분의 2 의석을 확보했고 3월 23일 이를 바탕으로 ‘전권 위임법’을 통과시켜 독재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나치 이외의 정당은 모두 해체되고 연방정부는 폐지되었다. 비판적인 인사들은 추방되거나 체포되어 8월까지 4만5000여 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었다.
방화범인 루베는 1934년 1월 10일 처형되었다. 그러나 처형은 불법이었다. 방화범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법안이 방화사건 이후에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노령으로 죽고 히틀러는 8월 18일 총통에 올라 대살육의 질주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