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지 천황
by 김지지
2018년 10월 23일은 일본 막부 통치를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일왕 세력이 새 시대의 원호(元號)를 ‘메이지(明治)’로 명명한 지 150주년이 되는 날.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가 주관하는 ‘메이지유신 15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된다.… 아베 총리는 ‘메이지유신의 태동지’로 자부하는 조슈(長州·현 야마구치현) 출신. 그는 정치를 하면서 메이지유신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소재로 활용해왔다. 19세기 중반 학당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를 만들어 메이지유신의 걸출한 인물들을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있다고 말해왔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을 아시아의 변방 어촌 국가에서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일왕을 떠받든 사무라이들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를 정착시켰고 산업화를 달성해 세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이 일본을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한 맹아가 됐다는 지적도 많다. 당시 서구의 팽창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중국·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 군홧발을 들이밀었다. <조선일보 2018년 10월 23일>

에도막부, 갑작스러운 흑선의 출현에 대경실색하고 혼비백산
에도(도쿄)를 근거지로 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수립된 1603년 이래 일본은 쇄국주의를 고수했다. 규슈의 나가사키·히라도에서 네덜란드·포르투갈 상인과의 국지적이고 단순한 교역은 예외적으로 허용했으나 일본 근해로 접근하는 외국 배들은 모두 쫓아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래도 서양 배들이 계속 접근하자 1825년 2월 에도 막부의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전국의 번주(다이묘)들에게 이양선을 몰아내라는 이른바 ‘이국선 타불령’을 선포했다.
그러던 중 1840년 청나라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해 굴욕적인 남경조약(1842)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에도 막부는 위기의식을 느껴 1842년 7월 ‘이국선 타불령’을 폐기하고 이양선이 원하면 물, 식량, 연료 등을 제공하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1846년 7월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제임스 비들이 2척의 전함을 이끌고 에도만 우라가항에 입항했다. 비들은 통상조약을 제시했으나 일본이 거부하자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고 일본을 떠났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53년 7월 3일 이번에는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4척의 검은 증기선을 이끌고 우라가항 앞바다에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흑선의 출현에 쇄국 체제를 고집해온 에도 막부는 대경실색하고 혼비백산했다. 페리 제독은 통상, 석탄·식량 공급, 난파선 보호를 이유로 개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겁을 집어먹은 막부의 노중(총리) 아베 마사히로가 이듬해 답서를 주겠다고 해 페리 제독은 “1년 후 다시 올 때까지 가부를 결정하라”고 통고한 뒤 일본을 떠났다.

페리 제독이 1,200여 명의 군인과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다시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1854년 2월 13일이었다. 미 함대는 막부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연일 함포를 쏘아대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베 마사히로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에게서 정무 일체를 위임받았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천황가(家) 조정에 의견을 구했다. 그때까지 천황은 막부의 통제와 간섭을 받는 무력한 존재였다.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교토의 황궁에서 제사나 지내며 소일하고 정치적 권한도 없었다. 이처럼 에도 막부로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받고 있던 천황가에 의견을 물었으니 아베 마사히로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천황의 권위를 높여주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