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김수영 탄생 100주년] 정치·사회 문제에 직접 참여하거나 투쟁하지 않았는데도 ‘참여시인’ ‘저항시인’으로 불리는 김수영의 삶에 대하여

↑ 김수영과 산문집 ‘詩여 침을 뱉어라’(1976년, 중판)

 

by 김지지

   

2021년 11월 27일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수영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아본다.

 

시 ‘묘정(廟庭)의 노래’(1946년)가 처음 활자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서

김수영 하면 자동적으로 따라붙는 수식어가 ‘참여시인’ ‘저항시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김수영은 참여와 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국내의 정치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실천적으로 참여하거나 투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를 통해 투쟁한 것도 아니다.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언급하고 그 문제 해결에 직접 개입한 시들이 1960년 4·19 이후 1년 동안에 쓴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를 포함해 대여섯 편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이를 두고 한 평론가는 “시대에 저항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그의 올곧은 선비 정신이 지식인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또 다른 평론가는 “그의 참여와 저항이 직접적 실천의 형태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글쓰기 속에서 세계에 대한 정신적 태도나 관점의 문제로 승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며 다소 추상적인 설명을 덧붙인다.

김수영 시비(출처 도봉구청)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2가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폐렴과 백일해 등을 앓으며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1935년 부친의 뜻에 따라 선린상고(야간)에 입학했으나 졸업 후에는 전공을 살리지 않고 다른 길을 걸었다. 1941년 졸업 후 선린상고 선배였던 이종구와 함께 일본 도쿄로 건너가 미즈시나 하루키(水品春樹) 연극연구소에 들어가 연출 수업을 받으며 연극에 경도되었다. 미즈시나 연극연구소의 전신은 쓰키지(築地) 소극장으로 구성원들은 주로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연극이 끝난 후에는 “천황제를 전복하자”고 열변을 토했다. 일본에서 함께 하숙생활을 했던 이종구의 증언에 따르면, 김수영은 소련의 사실주의적 연극이론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예술과 나의 생애’에 심취했다. 김수영은 1944년 늦가을 가족들이 있는 중국 길림으로 건너갔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

해방공간에서는 1945년 11월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중퇴했다. 그 무렵 박인환이 운영하는 ‘마리서사(茉莉書舍)’ 서점을 근거지로 삼아 당시 첨단을 걷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등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과 교유했다. 광복 후 최초로 나온 동인지 ‘예술부락’ 제2집(1946.3)에 처음 활자로 인쇄된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예술부락” 제2집(1946.3)에 처음 활자화된 시 ‘묘정의 노래’

 

1949년에는 김경린, 박인환 등 5명 시인의 시가 수록된 ‘신시론’ 동인지(제목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아메리카 타임지’와 ‘공자의 생활난’이라는 난해한 시를 발표해 모더니스트의 한 사람으로 주목을 끌었다. 시집은 김기림, 이상의 1930년대적 모더니즘을 1950년대 모더니즘으로 확산시키는 길목에서 징검다리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수영(왼쪽)과 박인환

 

시 ‘달나라의 장난’(1953년)을 경계선으로, 전과는 다른 시어와 시 형식 구사

김수영은 1950년 4월, 6살 연하인 이화여대 출신의 김현경과 결혼했으나 2개월만에 6·25전쟁이 발발, 신혼 살림은 몇 년간 파국을 맞게 된다.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김수영은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온갖 수모를 겪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패퇴하는 인민군에 붙잡혀 북으로 끌려가다가 탈출에 성공해 서울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대한민국 경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1951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 또다시 지옥 같은 생활을 견뎌야 했다. 다행히 수용소 야전병원 외과원장의 영어 통역관 일을 맡아 생활은 편해졌으나 무료한 삶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생니를 하나씩 뽑았다. 이후 김수영은 술에 취하면 틀니를 빼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포로수용소에서 김수영은 자신은 포로가 아니라 ‘민간 억류인’이라면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중 양자택일을 거부했다. 김수영이 포로수용소를 전전하고 있을 때 아내는 김수영의 생사를 알지 못했다. 사실상 죽었다고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피란지 부산에서 김수영의 선배 이종구와 동거에 들어갔다.

1961년 막내 여동생 졸업식에서 시인 김수영과 가족들. 왼쪽부터 김수영의 부인 김현경, 모친, 동생 김수명, 김수영 본인, 동생 김수환이다.

 

김수영은 1952년 11월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그의 눈에 남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자신의 처참한 경험을 알 리 없는 그들과 섞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힘들었다. 저 혼자 돌아가는 팽이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다. 김수영이 1953년 ‘자유세계’ 4월호에 발표한 시 ‘달나라의 장난’은 ‘팽이가 돈다’로 시작해 ‘팽이가 돈다’로 끝난다. ‘달나라의 장난’을 경계선으로, 김수영은 전과는 전혀 다른 시어와 시 형식을 구사했다. 이전에 보이던 한문투의 문장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어가 줄어들고 일상 용어가 자주 등장했다. 이후 김수영의 시들은 모더니스트들이 지닌 관념적 생경성에서 벗어나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지식인의 방황과 암담한 시대 속에 내팽겨진 소시민의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했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후 부산에 머물고 있을 때 아내가 부산에서 이종구와 동거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를 찾아가 “나와 함께 가자”고 했으나 아내는 거절했다. 김수영은 홀로 서울로 돌아왔고 아내는 1년 후 김수영에게 돌아왔다. 이 사건은 김수영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가족을 다시 꾸렸으나 전쟁통에 남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이 머무를 집도 없었다. 시를 써서는 입에 풀칠도 못하고 발표할 지면도 없었다.

김수영은 미8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 평화신문사 기자를 거쳐 1955년 6월 성북동 셋집을 떠나 주변이 온통 배추밭인 마포종점 근처 구수동으로 이사해 주로 번역과 양계로 생업을 이어갔다. 아내가 병아리 11마리를 사와서 시작한 양계는 규모가 꽤 커져 750마리까지 늘어났다.

김수영

 

4·19는 김수영의 문학적 생애에서 분수령이자 전환점

번역도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생업이었다. 밥벌이를 위한 번역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욕된 시간”이라 자조하며 “지긋지긋한 번역일”이라고 토로할 만큼, 이를 악물고 매달려야 하는 생계의 중요한 방편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시대의 문화적 후진성을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고 자극이었다. 김수영은 번역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정성스럽게 했다. 사전으로 해결이 안 되면 소공동 국립도서관으로 가서 확인했다. 시 ‘국립도서관’(1955)은 그때의 산물이다.

김수영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통역 일을 한 것에 비추어 영어에 재능이 있었다는 게 중론이다. 고등학교 때 이미 오스카 와일드를 원서로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낡은 외투 주머니에 항상 ‘애틀랜틱’이나 ‘포이트리’ 같은 외국 잡지를 꽂고 다녔다는 증언도 뒷받침한다. 앨런 테이트의 ‘현대문학의 영역(領域)’(1962) 등 6권의 단행본을 번역·출간한 것이야말로 그의 영어 실력이 어떠했지를 확실히 알려준다. 게다가 그는 1966년 영문학 강사로 연세대 강단에 서기도 했다.

김수영은 1957년 12월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고 1959년 생전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펴냈다. 이 시집은 1959년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선집’ 제1권으로 발간되었는데 제2권은 김춘수의 시집, 제3권은 전봉건의 시집이었다. 김수영의 시는 1950년대 중반부터 관념적 모더니즘의 허위와 기만성을 까발리고 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그렸다. 그러다 맞은 4·19를 계기로 사회성 짙고 현실참여적인 시를 썼다. 그럼 점에서 4·19는 김수영의 문학적 생애에서 분수령이자 전환점이었다.

1960년 4·19가 일어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1주일 동안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미친 듯이 거리와 골목, 다방과 술집을 쏘다녔다. 매일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시를 썼다. 불과 몇 달 사이에 1년치 시를 지었다. 이승만의 하야 소식이 들렸을 때 김수영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시가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다. 그 무렵 쓴 시 중에는 미국인도 소련인도 모두 이 땅에서 나가달라는 ‘가다오 나가다오’ 같은 당시 한국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운 시도 있었다.

1961년의 5·16쿠데타는 김수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뒤엎어버린 반동이었다. 5·16 직후 쓴 ‘격문(檄文)’ ‘모르지?’ 등 연작시에는 5·16을 빗대 쓴 시구가 자주 나타난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특유의 반복과 역설, 비약과 반전, 단절과 압축 등 갖가지 기법을 동원한 작품을 쏟아냈다. ‘거대한 뿌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설사의 알리바이’, ‘사랑의 변주곡’, ‘꽃잎 1·2·3’, ‘의자가 많아서 걸린다’ 등이 이때 발표되었다.

1959년 춘조사에서 발간된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 초판(왼쪽)과 ‘달나라의 장난’ 육필원고

 

시 ‘풀’(1968년)은 민중운동과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효시로 평가받아

1963년 김수영은 인상적인 시 한 편을 발표한다. ‘죄와 벌’ 이 그것이다. ‘죄와 벌’에는 아내·어린아들과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길 한복판에서 아내를 우산으로 두들겨 팼던 5년 전 경험을 시로 드러낸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 우리들의 옆에서는 / 어린 놈이 울었고”라는 충격적인 구절이 등장한다. 아내 김현경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수영은 술에 만취할 때면 1년에 두세 번씩 자신에게 사정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이를테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었는데 전쟁 중 아내가 이종구와 동거한 것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평론가도 있다. 자신의 치부를 시로 써서 자기비판을 한 것에 대해 거대한 시인다운 풍모가 드러난다고 상찬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어쨌든 이 시 때문에 김수영을 읽지 않는다는 여성들도 있다.

1968년 숨지기 보른 전 발표한 ‘풀’은 생애 마지막 시였다. ‘풀’은 민중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민중을 풀로 형상화함으로써 1980년대 초반부터 급격히 대두되기 시작한 민중운동과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풀’은 2007년 ‘시인세계’가 시인 1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가 뭐냐고 물었을 때 최고의 시로 뽑힐만큼 시인들 세계에선 으뜸으로 꼽힌다.

‘김수영 전집'(김수영 사후 50주년 결정판, 2018년)

 

1968년 6월 15일 김수영은 모처럼 받은 고료를 가지고 오후부터 문우들과 함께 청진동과 무교동 술집을 전전하다가 늦은밤 취한 채 홀로 술집을 나왔다. 그가 을지로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마포 서강 종점에 내린 것은 자정을 바로 앞둔 시간이었다. 김수영은 인적이 끊긴 밤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그때 갑자기 인도로 뛰어든 버스가 뒤에서 그를 덮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수영은 적십자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아침 영원히 눈을 감았다. 향년 47세였다. 유해는 서울 도봉산 선영에 묻혔다. 김수영의 아내는 관 속에 그가 평소 좋아하는 책 중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넣어주고 작별을 고했다.

김수영은 이렇게 황망히 떠났으나 암울했던 1970~1980년대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화려하게 부활했다.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년),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년), ‘김수영 전집’(1981년)이 간행되었으며 ‘김수영문학상’이 제정(1981년)되었다. ‘김수영 전집’ 중 1권(시)은 1981년 발간 후 지금까지 10만부 이상, 2권(산문)은 5만부 이상 팔려나갈 정도로 꾸준히 다량으로 판매되고 있다. 국문학과 대학원생들 사이에 “수영 금지”라는 말로 김수영 주제 논문 작성을 말릴 정도로 그를 다룬 학위논문 역시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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