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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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혼노지의 변’ 당해 할복 자살

↑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 장수 아키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는 모습. 메이지 시대 그림이다. (출처 위키피디아)

 

“손 안에 있는 새가 울지 않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전국시대를 호령하던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에게 던져진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각각 2살, 6살 밖에 차이 나지 않는 동시대 사람이었던 세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각기 다르게 대답해 셋의 성격을 비교하는데 종종 인용되곤 한다.

시대 배경은 이랬다. 오다가 활동하던 시대는 쇼군(將軍)이 천황을 제치고 실권을 장악한 시기를 말하는 막부(幕府)시대였다. 쇼군은 지방마다 다이묘(大名)를 임명해 전국을 통치했다. 오다는 하늘을 찌를듯하던 쇼군의 지위가 약화될 대로 약화된 무로마치 막부 말기에 등장했던 유력 다이묘의 한 사람이다. 약 1세기 동안 펼쳐졌던 약육강식의 그 시대를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쇼군의 권위가 무너진 군웅할거 시대인 틈을 타 지방의 다이묘들과 사무라이들은 힘에 의한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때 천하를 넘보며 등장한 이가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는 중세적 질서를 철저하게 파괴한 풍운아였고 전쟁의 천재였다.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킨 것도 오다였고 조총을 조직적으로 전쟁에 사용한 것도 오다가 처음이었다. 조총의 위력은 중세 일본의 전술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즉 조총전술은 용맹한 장군을 중심으로 긴 창과 기마군으로 싸워온 고전적인 전투 양상이 보병부대에 의한 조직적인 총격전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오다는 점차 전국시대의 혼란을 잠재우며 천하통일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그러나 1582년 6월 2일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묶고 있던 혼노지(本能寺)에서 그를 배신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아 “가이샤쿠(할복할 때 옆에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목을 침)를 부탁한다”며 스스로 할복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시대를 마감했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불의의 타격을 입을 때 “내 적은 바로 혼노지에 있다”고 하는 것도 이 ‘혼노지의 변’에 연유한다. 카이사르가 부르투스에게 피살되면서 “부르투스 너마저?”라고 했던 것의 일본판인 셈이다.  오다를 살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는 오다의 또 다른 부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토벌되어 일본은 도요토미 수중에 떨어진다.

그러나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이 아직 끝나지 않은 1598년 병상에 누웠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가장 신경을 쓴 것은 56세 나이에 얻은 6살짜리 아들의 장래였다. 도요토미는 아들의 기반구축을 위해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양자로 맞아들인 조카을 할복시키고 그의 가족까지 살해했다. 죽음에 임박해 도요토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해 5명의 최고 대신들을 불러놓고 “아들을 부탁한다”며 눈을 감았지만 지켜질 수 없는 당부였다. 도요토미의 유언을 받들기에는 도쿠가와의 야망이 너무 컸던 것이다.

도쿠가와에게 도요토미의 죽음은 대권을 장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요토미의 추종 세력들을 격파함으로써 일본 열도는 비로소 도쿠가와 손에 들어갔다. 1603년 쇼군에 오른 도쿠가와는 교토를 떠나 에도(도쿄)로 근거지를 옮겼다. 메이지유신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260년 동안 이어질 ‘에도막부 시대’의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오다가 열심히 농사를 짓고 도요토미가 맛있게 밥을 지어놓으니 밥상을 통째로 먹은이가 도쿠가와라는 비유가 일본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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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68혁명의 도화선 ‘6월 2일 사건’

1967년 서독. 젊은이들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다. 특히 ‘최전방 도시’ 베를린은 다른 도시에 비해 그 정도가 심했다. 1967년 6월, 팔레비 이란 국왕이 서베를린을 국빈 방문하자 학생들은 반민주적인 독재자 팔레비의 방문을 허용하려하지 않았다. 6월 2일 팔레비 부부가 오페라 ‘마적’을 감상하기 위해 도이치 오페라하우스를 찾았을 때 학생들은 극장 밖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도로는 수천명의 학생들로 뒤덮였고 저지선은 이미 뚫려 있었다.

저녁 8시가 되자 극장 밖에서 전쟁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돌진한 경찰이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시위대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온 것이다. 학생들이 우왕자왕하는 틈을 타 사복경찰이 주모자 색출에 나섰다. 베를린자유대생 벤노 오네조르크(26)도 달아났다. 그러나 갑자기 어둠 속에서 경찰의 곤봉이 날아들어 그를 쓰러뜨렸고, 수명의 경찰이 달려들어 마구 두들겨팼다. 그때 한발의 총알이 오네조르크 뒷머리를 관통했다. 서독 사회를 뿌리채 뒤흔들어놓을 총성이었다.

청년은 그 자리에서 죽었으나 베를린시 정부와 경찰은 거짓으로 일관하다 하루가 지나서야 경찰의 발포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경찰이 쓰러진 상태에서 칼로 위협당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포한 것이라고 발표하고, 베를린 시장이 대학생의 죽음을 시위학생들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발언함으로써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시위 물결은 베를린 담장을 넘어 서독 전역으로 번져갔고 정부와 경찰은 수세에 몰렸다. 학생들의 시위에 부정적이었던 언론도 점차 경찰의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사건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전 끝에 그해 9월 베를린 시장과 경찰총장이 물러남으로써 진실은 학생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발포 경찰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생들의 시위는 저항으로 발전했고, 낡은 대학정책과 권위적인 교수들에 대한 비판이 대학의 담을 넘어 사회쟁점으로 등장했다. 독일 68혁명의 진정한 출발을 알리는 신호였고, 이듬해 유럽 전역에 몰아칠 68혁명의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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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詩 ‘오적’ 파문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시도로 정치·사회적인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1970년, 잡지 ‘사상계’ 5월호에 세상을 들끓게 한 시(時) 한 편이 발표됐다. “서울이라 장안 한 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중략)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 만하고 목질기가 동탁 배꼽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렸다.” 김지하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이었다.

아이디어를 처음 제공한 사람은 사상계 편집위원 김승균이었다. 그는 사상계 5월호 주제인 ‘5·16쿠데타’에 맞춰 평소 알고 지내던 김지하에게 오적촌이라 불리던 동·서빙고동에 관한 장시를 청탁했다. 김지하는 당대의 힘있고 끗발있는 사람들을 ‘오적’으로 한데 묶어 그들의 부패와 타락상을 풍자적으로 시에 담았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여 매 분량으로 사상계 18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설마했지만 시중에 뿌려진 잡지가 거둬지고 김지하는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당국이 잡지를 더 이상 시판않겠다는 발행인 부완혁의 말을 믿고 김지하를 석방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처럼 조용히 끝날 수 있었던 사건이 사회적인 사건으로까지 비화한 것은 야당인 신민당이 정당사상 처음으로 기관지 ‘민주전선’ 6월 1일자 1면 전면을 털어 ‘오적’을 싣고부터였다. 사실은 오적 가운데 군장성 대목을 뺐기 때문에 오적이 아니라 ‘사적(四賊)’이었지만 일이 안되려는지 민주전선은 2~3면에 정인숙 사건과 현대판 아방궁 도둑촌 문제 등에 대한 국회발언 초록까지 실어 당국의 신경을 건드렸다.

6월 2일 새벽 1시50분경에 민주전선 10만 여부는 압수당했고 민주전선 편집국장 김용성은 구속됐다. 풀려났던 김지하도 김승균, 부완혁 등과 함께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반공법 위반,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동조)로 구속됐다. 수사 형평을 맞추기 위해 신민당 총재 유진산도 조사했다고 해서 당시 중정 수사관은 거꾸로 김지하 등 5명을 오적이라 불렀다. 사상계는 이 사건이 빌미가 돼 통권 205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김지하 등 관련자들은 보석으로 풀려나 2년 뒤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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