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중동 건설 붐… 삼환이 첫 물꼬 튼 후 국내 건설업체 속속 진출

삼환,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두각 나타내고 진가 발휘해

우리 건설업체가 처음 해외로 진출한 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의 베트남과 동남아시아였다. 베트남전이 끝난 1970년대 초반에는 유가 급등 덕에 막대한 오일달러를 벌어들여 도로, 병원, 항만 등 인프라 공사를 쏟아내고 있는 중동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척했다.

그러나 당시 중동 지역에는 우리 공관이 한 곳도 없어 건설업체 홀로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그런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중동 땅에 먼저 깃발을 꽂은 건설업체가 있었으니 삼환기업이었다. 설립자 최종환(1925~2012)은 황소걸음으로 건설 외길을 걸어간 우리나라 건설업의 개척자였다. 그는 남이 만들어놓은 길을 가기보다 새 길을 뚫어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뚝심의 경영자였다.

최종환은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이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강냉이 장사를 하며 7남매를 키운 모친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최종환이 장차 삼환그룹의 효시가 될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한 것은 21살이던 1946년 3월 15일이었다. ‘삼환’은 맏형인 명환과 둘째형인 영환과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뜻이다.

설립 초기 삼환은 주로 주한 미군에서 수주한 공사에 전념했다. 1960년대부터는 남산 자유센터(1964년), 조선호텔(1969년), 삼일빌딩(1970년), 국립극장(1973년), 프라자호텔(1976년), 태평로 삼성빌딩(1976년), 신라호텔(1978년), 광주박물관(1978년), 포항제철 공장(1971~1981년) 등을 지으며 사세를 확장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 호남, 영동, 남해, 동해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 공사에도 삼환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삼환은 관급 공사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부 발주 공사를 둘러싼 정치권력과의 정경유착이 최종환의 생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두각을 나타내고 진가를 발휘했다. 국내 건설이 걸음마 단계에 있던 1959년, 최종환이 해외 건설시장을 살피기 위해 3개월 동안 세계를 둘러본 일은 건설업계의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 여행은 국내 건설업의 해외 진출을 개척한 전환점으로 우리나라 토목건설사(史)에 기록되어 있다.

 

공사 위해 사막의 밤 하늘 수놓은 횃불은 장관

삼환은 1966년 4월 국내 건설업체 최초로 베트남의 사이공과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설치했다. 1972년부터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발주하는 공사에 3차례나 입찰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해 세계 시장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러나 1973년 6월 사우디의 카이바~알울라 간 고속도로 7공구(175㎞)를 수주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4번째 도전 만에 한국 건설업체로서는 처음으로 중동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우리나라와 교역도 없는 사막 지대 공사에 그것도 담보가 없는 회사에 지급보증을 서줄 국내 은행이 없었다. 최종환은 은행장을 찾아가 “인간 최종환을 믿어달라”며 호소해 지급보증을 받아냈다. 이때부터 최종환에게는 ‘인간 담보물’이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하지만 중동 땅에서 처음 이뤄진 공사는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

삼환은 첫 번째 수주 성공에 이어 1974년 사우디 제1의 도시 제다시를 현대화하는 제다시 미화 공사를 2427만 달러에 수주하는 데도 성공했다. 당시 제다시 측은 회교도들의 메카 순례 기간에 맞추어 공사를 앞당겨달라고 삼환에 요청했다. 마침 현장에 있던 최종환이 1인 3교대 철야작업을 지시했으나 전기 시설이 부족해 수천 개의 솜방망이에 불을 켜놓고 공사를 강행했다. 사막의 밤 하늘을 수놓은 횃불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어느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파이살 국왕은 “저렇게 성실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공사를 주라”고 특별 지시를 했다. 덕분에 삼환은 6500만 달러 규모의 제다시 미화 2차 공사를 수의 계약으로 따내는 행운을 얻었다.

이후 삼환은 사우디의 펜타곤으로 불리는 2억4000만 달러 규모의 사우디 방위사령부(1976~1980년)를 비롯 사우디 최고층 건물(27층)인 사우디 국립상업은행 본점(1978~1984년), 사우디 왕궁 및 왕자궁(1978~1981년) 등을 수주하며 승승장구했다.

 

다른 건설업체들도 경험, 기술, 인력, 장비를 중동 땅에 총동원

1980년대 들어서도 삼환의 해외 진출은 멈추지 않았다. 1978년 미수교 국가이던 예멘에 진출한 것을 계기로 1984년 북예멘 마리브 유전 개발에 참여하면서 원유사업을 시작했다. 요르단, 파푸아뉴기니, 방글라데시, 사할린 등 지역과 국가의 구분 없이 사업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1985년에는 3400만 달러 규모의 알래스카 교도소 공사를 수주해 우리나라 건설업체 중 최초로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삼환이 중동에 길을 트자 그동안 베트남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해외 건설에 경험을 쌓아오던 국내 건설업체들도 1970년대 중반부터 속속 중동으로 진출했다. 우리 건설업체들은 베트남에서 닦은 경험과 기술, 인력, 장비들을 중동 땅에 총동원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난 데다 오일 쇼크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정부는 이 시련기를 벗어나기 위해 국내 업체들의 중동 진출을 총력 지원했다.

1974년 남광토건, 신한기공에 이어 1975년 대림산업, 신원개발이 중동에 진출하고 1975년 10월에는 현대건설이 그때까지 국내 건설업체가 수주한 해외공사로는 최대 규모인 1억4460만 달러짜리 바레인 수리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등 중동 곳곳에 한국의 깃발을 꽂았다. 1976년 2월에도 현대건설이 단일 공사로는 세계 최대로 일컬어지던 사우디의 주베일 산업지역 신항 건설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 건설업계를 놀라게했다.

중동건설 붐 덕에 해외 건설 연간 수주액은 1976년 25억 달러, 1978년 81억 달러를 기록했다. 1981년에는 세계 33개국에서 136억 달러의 실적을 기록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해외 건설 강국으로 부상했다. 1983년엔 동아건설이 36억 달러의 리비아 대수로 1단계 공사를 수주하는데 성공, 기네스북에 오르고 해외 건설의 한 획을 그었다.

 

해외건설 수주액 최고기록 2010년까지 매년 갈아치워

그러나 계속될 것만 같던 중동 붐은 1984년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84년 101억 달러, 1985년 47억 달러로 줄어들더니 급기야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엔 16억 달러로 급감해 1992년까지 침체기가 이어졌다. 유가 하락으로 오일달러가 줄어든 중동 국가들이 건설투자를 줄인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한국 건설업체들의 기술적인 한계도 일부 작용했다.

후유증이 심각했다. 악성 미수금이 늘어나면서 일부 업체는 도산 또는 은행관리에 들어갔고 증권시장에서는 사고뭉치 취급을 받았으며 건설업체에 대한 이미지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잠시 회복되는가 싶었으나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다시 침체기를 맞았다.

그러다가 2004년부터 다시 중흥기를 맞아 2005년 108억 달러를 시작으로 2006년 164억 달러, 2007년 398억 달러, 2008년 476억 달러, 2009년 491억 달러, 2010년 716억 달러를 기록하는 등 연일 해외건설 수주액 최고기록을 갈아치웠다. 2011년 들어 591억 달러로 잠시 주춤하긴 했어도 649억(2012년), 652억(2013년), 660억(2014년) 등 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후 하락세로 돌아서 461억(2015년), 282억(2016년), 321억(2018년) 달러를 기록했다.

이렇게 쌓인 해외 건설 공사 누적 수주액은 2018년 9월 8000억 달러를 넘겼다. 지역별로는 중동 4303억 달러(53.8%), 아시아 2560억 달러(32%), 중남미 394억 달러(4.9%), 북미·태평양 307억 달러(3.8%), 아프리카 240억 달러(3.0%), 유럽 198억 달러(2.5%)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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