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100억 달러 수출 달성

빈약한 기술과 자원 밖에 없던 1960∼70년대. 수출은 운명이었고 당위였다. 그 시절, 저임금으로 물건을 만들어 내다파는 것 그 길 말고는 먹고 살 일이 없었다. 수출을 위한 전 과정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됐다. 총사령관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으로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신설, 수출을 직접 챙기고 독려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1964년 11월 30일에 돌파한 1억달러 수출이었다. 정부는 이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 매년 이날을 기념하며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수출입국’의 기치를 내세워 앞만 보고 달리기를 14년. 그토록 소망해온 100억 달러 수출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목표보다 3년 앞당긴 성과였고 아시아에서는 일본(1967년)에 이어 2번째였다.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100억 달러 수출을 자축하기 위한 기념식이 박 대통령을 비롯한 7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연평균 수출신장율 42.4%, 수출품목 1200여개, 수출시장 133개국, 세계 수출액의1%. 자랑스러운 우리의 수출 성적표였지만 수출역군들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고사리, 은행잎, 중석 등이 뚫어놓은 수출의 길을 합판과 가발이 밟으며 수출을 견인했다. 합판은 1960년대 수출의 대명사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어린 여공들의 희생을 발판삼아 섬유산업이 수출 전면에 나섰다. 그동안 10억 달러(1971년)를 달성했고 한일합섬이 처음으로 1억 달러 벽을 돌파(1973년)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장미빛 청사진 만을 보여준건 아니었다. 산업간·지역간 격차가 벌어졌고 자원배분이 왜곡됐으며 저임금의 희생도 눈에 띄게 늘었다. 수출을 많이 한 회사는 금융특혜를 마음껏 누리며 땅을 사들이고 빌딩을 세우며 ‘재벌’로 성장해나갔다. 고도성장시대의 그늘이 넓고 짙다고 해서 햇빛을 가릴 수도 나무를 자를 수도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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