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 선출

체코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난 바츨라프 하벨과 부르주아를 부정하는 체코 공산당의 불화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반정부적 기질은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 때 폭발했다. 개혁파 지식인의 기수로 소련의 체코 침공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벨은 세계적인 극작가였지만 결국 이 일로 시골 맥주공장으로 쫓겨나 1974년까지 암울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작품들도 출판이 금지됐다.

그렇다고 기가 꺾일 하벨이 아니었다. 1975년에는 후사크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내 공산당 독재체제를 신랄하게 비난했고, 1977년에는 체코 지식인과 성직자들을 주축으로 한 인권단체 ‘77헌장’그룹을 결성, 공산정권 치하의 얼어붙은 땅에 ‘민주화의 씨앗’을 뿌렸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으로 하벨은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89년 민주화·자유화 열기가 구소련과 동구권을 거세게 몰아칠 때 체코 국민들도 21년 만에 다시 찾은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했다. 사람들은 아케스 공산당 서기장 퇴진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11월 23일 하벨이 벤체슬라스 광장에 운집한 30만 명 군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해냈다. “우리는 다시 옛날의 전체주의로 돌아갈수 없다.” 사람들이 함성으로 화답했고 그의 연설은 벨벳혁명(무혈혁명)의 물꼬를 텄다. 11월 24일 아케스 서기장이 사임하고 12월초 공산당이 1주일 전 결성된 ‘시민포럼’에 신변안전을 의탁했다. 1989년 12월 29일 체코 의회의 만장일치로 임시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하벨은 41년 만에 처음으로 비공산당 출신 대통령이 됐다. 하벨은 피로 얼룩진 유고분열과는 달리 ‘타협과 조정’으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분리시켰다. 연방이 두동강난데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나 독립된 체코 국민이 그를 다시 불렀다. 1993년 초대 대통령에 선출돼 13년간 대통령으로 재임하다 2003년에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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