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경허, 수제자에게 ‘만공’ 법호 지어주고 잠적

경허는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 만공은 덕숭 문중의 뿌리

경허(1849~1912)는 조선 500년 동안 억불숭유로 인해 사실상 맥이 끊긴 ‘간화선’(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을 살려내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으로 불린다. 제자인 만공(1871~1946)이 충남 덕숭산을 중심으로 선풍을 진작하고 수많은 선사를 배출해 마침내 도도한 강물을 이루니 이를 두고 ‘덕숭 문중’이라고 한다. 오늘날 ‘선의 종갓집’으로 불리는 덕숭 문중은 한국 불교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본격적인 문중이다.

경허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가세가 기울자 9세 때 관악산 청계사의 계허 문하에서 출가했다. 14세에 계룡산 동학사로 보내져 그곳에서 불교 경전과 유가·노장 사상 등을 두루 섭렵하고 1871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강사로 추대되었다.

30세이던 1879년 6월, 불현듯 옛 스승 계허가 보고 싶어 청계사로 가던 도중 충남 천안 부근의 어느 마을에서 폭풍우를 만나 하룻밤 묵을 집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마을에는 콜레라로 집집마다 시신이 널브러지고 죽음의 공포가 뒤덮여 있었다. 문득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어버린 경허는 동학사로 되돌아와 강원의 문을 폐쇄하고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모두 헛소리”라며 학인들을 돌려보냈다. 경전 학습으로는 생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그간 공부하고 강의했던 경전의 구절은 사구(死句)에 불과하다고 깨달은 것이다.

이후 동학사의 토굴에 틀어박혀 날카로운 송곳을 턱 밑에 세워놓고 참선에 들었다. 깜박 졸면 선혈이 흘러내렸다. 홀로 용맹정진하던 어느 날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콧구멍이 없다(無鼻孔牛·무비공우)”는 한 처사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 순간을 경험했다. 당시 선가(禪家)에는 진정한 깨달음 후 그것을 굳게 다지는 ‘보임(保任)’ 수행 기간을 갖는 것이 전통이었다.

경허 역시 보임을 위해 1880년 충남 서산군의 천장암에 은거하면서 1년 넘게 좁은 골방에서 장좌불와했다. 누더기 옷을 입고 목욕도 하지 않았으며 모기, 빈대, 이로 몸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도 동요하지 않았다.

 

경허, 덕숭산의 수덕사를 중심으로 호서 일대에 선풍 일으켜

‘숨 쉬는 등신불’처럼 1년 동안 지내던 1881년 6월 어느 날 경허는 다시 큰 깨달음을 얻어 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선승이 크게 깨달았을 때 읊는다는 ‘오도송(梧道頌)’을 불렀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이네(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六月燕巖山下路·육월연암산하로)/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경허의 오도송은 잠자던 조선 불교 선맥의 회생이었고 한국불교 근대 선(禪)의 시작이었다.

경허는 이후 덕숭산의 수덕사를 중심으로 호서 일대에 선풍을 일으켰다. 그에 그치지 않고 영남의 범어사와 해인사와 통도사, 호남의 송광사와 화엄사, 그리고 금강산의 마하연사와 오대산의 월정사 등 발길 닿는 곳마다 선원을 열었다. 대중은 거침없는 그의 법문을 통해 선의 세계로 인도되었고 그가 지난 자리에는 반드시 선풍이 일어났다. 그렇게 경허는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가 되었다.

경허는 전국을 돌며 꺼져가는 선풍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중에도 마음에 드는 후학을 만나면 제자로 삼아 서산의 천장암에서 수행하게 하고 그 자신 틈틈이 천장암을 찾았다. ‘경허 문하의 세 달’로 불리는 월면(만공), 수월, 혜월이 출가한 곳도 천장암이었다.

 

음주식육과 여색을 서슴지 않는 ‘막행막식’ 일화로도 유명

경허는 파격을 통해 깨달음을 시험하고 명분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다 보니 음주식육과 여색을 서슴지 않는 ‘막행막식’ 일화로도 유명했다. 절 안에서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침식을 같이하고, 어머니 앞에서 발가벗는가 하면, 법상에 올라 술을 마시고 돼지고기를 삶아오게 하는 등 무애행(막힘 없는 행동)에 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기행으로 인해 “선승이냐 괴승이냐”는 논란까지 있었다.

경허는 1904년 7월 수제자인 월면에게 ‘만공’이라는 법호를 지어주고 천장암을 떠나 잠적했다. 1905년 오대산 월정사와 금강산 등을 유람하던 경허가 1906년 자유인으로 나타난 곳은 함경도의 삼수와 갑산이었다. 예로부터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삼수갑산은 지세가 험하고 교통이 불편해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려운 오지 중의 오지였다. 경허는 유발거사(有髮居士) 박난주를 자처하며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시정주화(詩情酒話) 등에 젖은 생활을 했다.

경허는 1912년 4월 25일(음력) 함남 갑산에서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다. 빛과 경계 다같이 공한데 또다시 이 무슨 물건이려오”라는 말을 남기고 육신의 옷을 벗었다. 제자 만공은 1913년 7월 갑산에서 경허의 시신을 다비(화장)하고 유품을 수습한 뒤 수덕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스승의 선맥을 이어 그 자신이 근대 고승이 되었고 제자 고승들을 키워냈다. 이른바 덕숭 문중의 화려한 개막이었다. 이처럼 만공은 13세 때 스승 경허를 만난 이래 경허가 뿌린 선(禪)의 씨앗을 가꾸고 밭을 비옥하게 만든 수제자였다.

 

화엄경 제1게송을 읊던 중 만물의 본래 모습이 보이는 첫 깨달음 얻어

만공은 전북 태인에서 태어났다. 12세이던 1883년 어머니와 함께 김제 금산사를 다녀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꾼 후 출가의 뜻을 세웠다. 13세이던 1884년 무작정 집을 나와 이 절 저 절을 떠돌다가 계룡산 동학사의 진암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6척 장신의 경허가 동학사로 왔을 때 비로소 경허를 만났다. 진암이 경허에게 만공을 제자로 삼으라고 청하자 경허는 만공을 서산 천장암에 있는 태허 스님에게 보냈다. 태허는 경허의 친형이었다.

만공은 1884년 12월 8일 태허를 은사로, 경허를 계사로 삼아 사미계를 받고 ‘월면’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때 천장암에는 30세의 수월과 23세의 혜월 두 사람이 피나는 정진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천장암에서의 10년이 흘러 만공은 22세가 되었다.

1893년 11월 1일 천장암에 들른 한 어린 승려가 “모든 것은 한곳으로 돌아가는데 그 한곳은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만법귀일 일귀하처)”라고 만공에게 물었다. 만공은 처음 듣는 화두에 앞이 캄캄해졌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무지의 고통 속에 잠겨 있다가 천장암을 빠져나와 충남 온양의 봉곡사를 찾아갔다.

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2년 동안 정진했다. 그러다가 1895년 7월 25일 새벽,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보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라는 화엄경 제1게송을 읊던 중 앞을 가로막았던 의심의 안개가 걷히고 일체 만물의 본래 모습이 보이는 첫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형상이 살고 죽는 것조차 마음이 지어낸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후 봉곡사를 떠나 충남 공주의 마곡사 토굴에 들어가 보임 정진에 들어갔다.

만공이 1년 동안 보임 정진을 하고 있던 1896년 7월 경허가 토굴에 나타나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다”며 무자(無字) 화두를 던졌다. 만공은 화두에 천착하면서도 전국을 돌며 대중을 선의 세계로 인도하는 경허를 시봉했다. 그러다가 1901년 경허와 헤어져 경남 통도사 백운암에서 홀로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완전한 깨달음을 경험했다. 만공은 그해 7월 천장암으로 돌아가 다시 보임 정진에 들어갔다.

1904년 7월 경허가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암에 들러 만공의 보임 공부 내용을 물었다. 결과적으로 마지막 만남이자 마지막 시험에서 경허는 만공의 경지를 확인하고 비로소 만족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음력 7월 보름 밤 전법게를 내리면서 가득할 만(滿)자 빌 공(空)자 ‘만공’이라는 법호를 지어주고 홀연히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허에서 발원한 선의 물줄기가 만공에 이르러 큰 강물 이뤄

만공은 1905년 4월 충남 덕숭산 자락에 띠집 한 칸을 지어 ‘금선대’라는 암자를 짓고 머무르니 사방으로부터 수행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경허에서 발원한 선의 물줄기가 비로소 만공에 이르러 큰 강물이 된 것이다. 만공은 1930년부터 3년여 동안 금강산 유점사와 마하연사에서 조실로 있으면서 선을 지도하고 1937년을 전후해 잠시 공주 마곡사의 주지를 맡았던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렀다.

덕숭산에서는 수덕사와 정혜사 등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상대로 선풍을 드날렸으며 불교계의 거목을 키워냈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도량도 지어 견성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어지러운 삶을 등지고 절에 온 신여성 김원주가 머리를 깎고 ‘일엽’으로 거듭난 곳도 견성암이었다.

만공은 일제에 의해 박멸되어가는 한국 불교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져 항거한 실천적 선사였다. 만공이 31본산 중 하나인 마곡사의 주지로 있던 1937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가 조선 불교의 진흥책을 논의한다며 조선 13도 도지사와 31본산 주지를 불러모았다. 미나미 지로 총독이 “과거 데라우치 전 총독이 사찰령을 제정(1911)한 덕에 승려들이 도성을 출입하고 취처할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조선 불교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가 마땅히 하나로 합쳐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했다. 이는 내선일체라는 허울로 한국 불교의 숨통을 완전히 끊겠다는 선포였다.

모두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만공이 단상으로 나가더니 “대처승 도입으로 조선 불교를 타락시킨 데라우치는 지금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있다”고 일갈했다. 미나미 총독에게도 “조선 불교의 진흥책은 총독부의 불간섭이 가장 상책”이라고 호통을 친 뒤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1941년에는 과거 조선의 세도가들이 절을 홀랑 뜯어내고 묘를 쓴 서산 앞바다 간월도의 묘를 다시 없애고 간월암을 복원해 애제자들로 하여금 해방 직전 1,000일 동안 조국 광복을 위한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말년에는 덕숭산에 전월사라는 작은 암자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 20일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보며 “만공, 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 되었으니 이별해야 겠네”라고 말하며 한바탕 껄껄 웃은 뒤 열반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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