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8년 개관한 YMCA 건물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속속 가입하면서 독립협회 후신처럼 비쳐
이 땅의 YMCA 역사는 1899년 조선의 상류층 청년 150여 명이 YMCA 창설 요청서에 서명하고, 호러스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젤러가 이 요청서를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발송하면서 시작된다. 상류층 청년들이 YMCA 설립을 요청한 이유는 초기 조선 교회 선교의 초점이 주로 하층민들에게 맞춰진 데 따른 자구책의 성격이 짙다. 당시 상류층 청년들은 교회에 가고 싶어도,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도 이미 평민들이 기성 교회를 차지하고 있어 아직 반상(斑常)이 유별한 상황에서 선뜻 교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대신할 새로운 장소를 YMCA에 요청한 것이다.
YMCA는 영국 런던 히치콕로저스 상점의 점원이던 조지 윌리엄스 등 12명의 청년이 산업혁명 직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즐길 만한 활동을 염두에 두고 1844년 6월 6일 친교 모임을 만든 것이 시초다. 이후 구미 각국으로 확산되어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창립총회에서 YMCA 세계연맹이 결성되었다. 총회에서는 성서의 한 구절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요한복음 17장 21절)를 모토로 채택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설립 요청서를 보내오자 북미 YMCA 국제위원회는 이미 중국에서 YMCA를 설립한 경험을 살려 이 분야에 정통한 D.W. 라이언을 1900년 6월 서울로 보내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도록 했다. 라이언은 9월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긍정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 전달했다. 보고서를 검토한 국제위원회는 조선의 YMCA 창립을 의결하고 1901년 9월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1872~1938)를 창설 책임자로 조선에 파견했다. 질레트는 1901년 10월 말 조선에 도착했다. 이후 2년간의 준비 끝에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가 서울 정동의 유니언클럽에서 창립총회를 연 것은 1903년 10월 28일이었다. 호머 헐버트가 의장으로 사회를 보는 가운데 제임스 게일 목사가 헌장 초안을 낭독하고 미국·영국 등 6개국 37명(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의 회원이 헌장 초안에 만장일치로 서명함으로써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마침내 이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질레트를 초대 총무, 게일과 헐버트를 각각 회장·부회장에 선임함으로써 초창기의 모양새를 갖췄다.
질레트는 1904년 현재 종로2가에 있는 서울YMCA의 대지를 사들여 가건물을 짓고 사업을 시작했다. 창립 초기에는 김규식·최재학 등 일부 조선인만이 참여해 참여도가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옥에 갇혀 있던 이상재·윤치호 등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출옥 후 속속 가입하면서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독립협회의 후신인 것처럼 비쳤다.
YMCA 본부에 설립을 요청한 것은 상류층 청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활기를 띤 것은 이상재가 교육부 위원장으로 발을 들여놓은 1905년 5월부터였다. 그 무렵부터 청년들이 선교 활동의 일환인 성경반에 적극 참여하고 목공, 천공, 제화, 염색, 사진, 인쇄 등 각종 실용적인 기술 교육을 받고 야구, 유도, 검도, 축구 등 운동경기를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또한 구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이필주와 이하종 등을 교관으로 내세워 1주일에 3시간씩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일본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이런 활동을 내심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미국인과 영국인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어 차마 간섭은 못 하고 대책을 세우는 데만 골몰했다.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YMCA 회관은 미국의 워너메이커가 기부한 4만 달러를 기반으로 1907년 6월 서울 종로 2가의 현 위치에서 공사를 시작해 1908년 12월 3일 3층짜리 벽돌 건물로 개관했다. 1907년 11월 7일의 정초식 때는 고종이 영친왕을 현장에 보내 ‘일천구백칠년(一千九百七年)’이란 글을 머릿돌에 쓰게 하고 1만 원의 하사금과 은으로 만든 흙손 두 자루를 보내 격려했다. 준공식은 이완용 당시 총리대신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핵심 역할을 한 학생 YMCA는 1910년 6월 서울 근교 진관사에서 개최된 제1회 기독학생 하령회를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1911년 9월쯤 학생 YMCA가 6개로 늘어나는 등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제가 마침내 탄압의 칼을 빼들었다.
‘105인 사건’(1911년)은 YMCA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의도 커
첫 탄압은 1911년의 ‘105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흔히 ‘105인 사건’은 신민회 지하조직을 꺾기 위한 조작극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YMCA 세력을 꺾기 위한 의도도 그에 못지않았다. ‘105인 사건’으로 윤치호, 이승훈, 양전백 등 중형을 선고받은 주동 인물의 상당수가 YMCA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YMCA 관련 주요 인물들이 대거 붙잡혀가거나 해외 망명길에 오르는 등 황성기독교청년회의 활동이 위축될 조짐을 보이자 질레트, 언더우드, 모펫 등 선교사들이 데라우치 총독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일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다른 흉계를 꾸몄다. YMCA 부총무로 있던 이완용계의 김린을 매수해 ‘유신회’라는 일종의 모반 세력을 YMCA 안으로 침투시켜 이상재 등 민족 세력을 쫓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조선의 YMCA는 마침 내한한 북미 YMCA의 총무이자 194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 존 모트를 중심으로 일본의 음모와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YMCA 이사회는 1913년 2월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김린을 부총무직에서 파면하는 등 일제의 입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래도 1913년 6월 ‘황성’이라는 명칭 대신 ‘조선중앙’으로 명칭을 바꾸라는 일본의 요구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황성기독교청년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로 개칭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가 비로소 자주적인 단체로 재출발한 데는 1913년 중국으로 떠난 질레트에 이어 2대 총무로 부임한 이상재와 1916년 취임한 3대 총무 윤치호의 역할이 컸다. YMCA 전국 연맹은 1914년 4월 개성에서 경신학교, 광주숭일학교, 군산영명학교, 배재학당, 세브란스의전, 전주신흥학교 등 9개의 학생YMCA와 황성기독교청년회 대표 등 45명이 모여 결성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19년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설립한 도쿄 YMCA에서 2·8 독립선언이 일어났고,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9명이 YMCA와 관계있는 인물일 정도로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질레트는 초대 총무이자 조선 근대 체육의 아버지
YMCA의 초대 총무 필립 질레트는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태어나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 YMCA 전문학교와 콜로라도대를 졸업했다. 조선으로 건너오기 전 예일대에서 1년 반 동안 수학하고 YMCA 전도 담당 부목사로 활동하다가 1901년 10월 제물포항으로 내한했다. 1903년 YMCA 창립총회 직후 엘런 버사와 결혼, 두 딸을 낳았으나 한 딸은 1905년 아기 때 사망해 지금의 양화진 제1묘역에 묻혔다.
그는 야구, 농구, 복싱 등 각종 스포츠를 국내에 처음 선보여 ‘조선 근대 체육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특히 그가 공을 들인 것은 야구였다. 질레트가 입국하기 전 국내에서 최초로 벌어진 야구 경기는 1896년 4월 25일 서울 거주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 사이의 경기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인디펜던트’지에 기사로 소개되었다. 그해 6월 23일의 경기에는 서재필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이 경기들은 미국인(서재필 포함)들의 경기여서 한국 야구의 기원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질레트는 YMCA 임시 회관으로 사용 중이던 서울 인사동 태화관 앞에서 미국인들이 캐치볼을 하는 것에 조선인들이 관심을 보이자 야구를 선교 수단으로 삼기 위해 미국에 야구 용품을 주문했다. 1904년 배트와 글러브 등 야구 장비가 들어오자 현동순, 허성, 김연호 등으로 구성된 ‘황성기독교청년회 야구단’을 창단,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야구는 덕어(독일어)학교, 일어학교, 영어학교 등 외국어학교를 중심으로 퍼졌다. 1906년 3월 15일에는 동대문구장 자리인 훈련원 마동산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덕어(독일어)학교가 야구경기를 벌였다. 정확한 스코어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덕어학교가 3점 차로 승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경기는 조선 최초의 야구 경기로 기록되어 있다.
YMCA 야구단 초창기 야구 붐 주도
YMCA 야구단은 조선 최강팀으로 지방 원정을 다니며 초창기 야구 붐을 주도했다. 걸음마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국내 야구는 1909년 도쿄 유학생 야구단이 방문해 친선경기를 치르면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당시 도쿄 유학생 야구단은 YMCA 야구단을 상대로 10점 차의 대승을 거뒀다. 1912년에는 YMCA 야구단이 일본으로 원정 경기를 떠나 국내 스포츠 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를 벌였다. YMCA 야구단은 7전 1승 1무 5패의 전적을 안고 귀국했다. 질레트는 1907년 회원들에게 농구도 가르쳤으나 시간에 쫓겨 야구만큼 적극적으로 전파하지는 못했다.
길례태라는 조선 이름을 가질 정도로 이 땅에 애착이 많았던 질레트는 1910년 한일합방 후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다 조선을 떠나야 했다. 일제가 1911년 ‘105인 사건’을 날조해 윤치호 당시 YMCA 부회장 등을 주동자로 몰아 수감하자 질레트는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에든버러 국제기독교선교협회로 발송했다. 그런데 중국 일간지 ‘차이나 프레스’지가 문서를 입수해 공개하자 총독부가 질레트의 사퇴를 종용했다. 결국 질레트는 1913년 6월 중국에서 열리는 YMCA 지도자 강습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질레트는 중국 각지에서 YMCA 총무로 활동하고 상해임시정부에도 재정 지원을 하다가 1932년 퇴임했다. 1937년 미국으로 돌아가 1938년 11월 심장마비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