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이성계, 조선왕조 창건 후 한양 천도(遷都)

개경에서 조선왕조를 창건(1392년 7월 17일)한 태조 이성계는 즉위 후 곧 한양 천도(遷都)를 시도한다. “개경의 지기가 쇠했다”는 소문도 천도를 자극했지만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 귀족들의 경제적·군사적 힘을 무력화시킬 필요가 우선했다. 건국 과정에서 개경 사람들이 흘린 피도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기득권을 포기하기가 싫었던 신하들이 “한양에는 마땅한 궁궐이 없고 성곽도 안전하지 않아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천도를 반대하자 결국 태조는 반대 여론에 밀려 한양 천도를 중단하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했다.

계룡산 신도읍을 첫 후보지로 선정해 10개월이나 공사를 진행했으나 “계룡산이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고 풍수지리적으로도 쇠약한 땅”이라는 신하들의 주장이 잇따르자 태조는 할 수 없이 건설을 중단시켜야 했다. 두 번째 후보지로 선정된 모악(서대문구 안산을 등진 연희동·신촌 일대)도 도읍지로는 부적절한 곳으로 결론이 나자 결국 1394년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 29일) 한양으로 천도를 강행하고 이듬해 한성부로 이름을 바꿨다. 600년 ‘서울 시대’의 개막이었다.

한양은 고려 문종 때 남경으로 승격돼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궁궐을 지어(1104년) 국왕이 가끔 들러 묵었던 곳이다. 범위는 북악산을 중심으로 낙산(동)·인왕산(서)·남산(남)으로 에워싼 지역이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과 방번을 잃고 신덕왕후 강씨까지 죽자 상심한 태조는 상왕으로 물러나고, 왕위를 물려받은 정종 또한 한양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자 다시 개경으로 천도를 결심한다.

1399년 3월 7일 정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개경으로 발길을 돌렸다. 태조도 개경으로 향하면서 신덕왕후가 묻혀있는 정릉에 들러 격정을 토해냈다. 다시 한양으로 환도한 것은 방원 즉위 후인 1405년(태종5년) 10월이었다. 1994년 제정된 ‘서울시민의 날’은 태조가 한양에 입성한 음력 10월 28일을 양력 10월 28일로 바꿔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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