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육사·공사의 신입생도 모집 경쟁률이 사상최고라는데… 육군사관학교 창설부터 현재까지의 빛과 그림자

↑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행진하는 모습 (출처 육군사관학교 홈페이지)

 

by 김지지

 

육군사관학교와 공군사관학교의 신입 생도 모집 경쟁률이 사상최고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육군에 따르면 2020학년도 육사 생도 80기 선발 1차 시험 경쟁률이 개교 이래 최고인 44.4대 1로 나타났다. 330명 모집(남자 290명·여자 40명)에 1만4663명이 지원한 결과다. 육사 경쟁률은 2015년 18.6대 1, 2016년 22대 1, 2017년 31.2대 1, 2018년 32.8대 1, 2019년 34.2대 1로 꾸준한 상승 추세다. 공군사관학교도 마찬가지다. 공사의 경우 2020학년도 72기 사관생도를 215명 모집하는 데 1만480명이 몰려 48.7대 1을 기록했다. 육군사관학교 창설 과정을 살펴본다.

 

국군 창설 후 첫 장교 배출한 곳은 군사영어학교

대한민국 국군은 1945년 11월 13일 미 군정이 공포한 군정법령 제28호에 따라 미 군정청 내에 설치된 ‘국방사령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방사령부는 군 조직을 통괄하는 군사국과 경찰 조직을 관할하는 경무국을 두 축으로 삼아 해방공간의 무질서를 바로잡았다. 미 군정은 국방사령부 설치 후 바로 군대를 창설하려 했으나 한·미 간 언어 소통이 선결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자리에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했다.

군사영어학교 건물

 

군사영어학교는 당초 설립 목적이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가르쳐 미군 통역관을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출신을 적절히 배합하려 했다. 그러나 광복군 출신들은 “우리들이 광복군의 법통을 이어받아 장차 국군의 모체가 되어야 한다”며 입교를 거부했다.

60명으로 시작한 학생은 한때 200명까지 늘어났으나 졸업 후의 진로가 분명치 않아 자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결국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순차적으로 109명만이 졸업했다. 초기 졸업생 가운데 21명은 40여일 간의 군사교육을 받고 1946년 1월 15일 대한민국 국군 첫 장교로 부임했다. 이형근, 채병덕, 유재흥, 장석윤, 정일권이 군번 1번부터 5번까지를 부여받은 영광의 주인공들이었다. 뒤이어 며칠 간격으로 109명 모두 임관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자 중 78명이 훗날 별을 달고 그 가운데 13명이 참모총장, 7명이 합참의장에 오를 정도로 군사영어학교는 창군기에 중추 역할을 했다. 군사영어학교의 폐교로 미처 졸업하지 못한 60명은 1946년 5월 1일 창설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로 편입되어 임관했다.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는 ‘남조선 국방경비대’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된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창설되었다. 이날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태릉(지금의 육사 자리)에 위치한 구 일본군 특별지원병훈련소에서 제1연대 제1대대 A중대가 편성됨으로써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후 39년만에 우리 민족의 정식 군대가 탄생했다. 초대 총사령관으로는 존 마셜 미군 중령이 임명되었다. 국방경비대는 주로 군사영어학교 출신들로 장교를 채운 뒤 병사 225명을 선발하겠다고 공고했다. 그러자 1,000여명이 지원해 성황을 이뤘다.

국군 창설 초기의 병영 모습. 병사들이 검열을 받기 위해 막사 앞에 총기를 세워 놓고 정렬해 있다.

 

국방경비대 창설은 제1연대 창설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시작했으나 실제로 처음 창설된 부대는 A중대(중대장 채병덕) 1개 중대 뿐이었다. 187명으로 구성된 A중대는 1월 17일 편성이 완료되었다. 뒤이어 본부중대(중대장 장석윤)와 B중대(중대장 정일권)가 편성되고 3개 중대를 지휘할 1대대장에는 A중대장이던 채병덕이 임명되었다.

제1대대 발족 후 제2대대와 제3대대까지 편성한 국방경비대가 제1연대 편성을 완료한 것은 1946년 9월 18일이었다. 뒤이어 2연대(대전), 3연대(전북 이리), 4연대(광주), 5연대(부산), 6연대(대구), 7연대(충북 청주), 8연대(강원 춘천) 등 7개 연대가 각 도에 창설되었다. 제주도의 9연대는 제주가 1946년 8월 도로 승격된 후 11월에 창설 작업을 시작해 1948년 7월에 완료했다.

말이 연대 창설이지 병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처음에는 200명 규모의 1개 중대를 먼저 편성하고 현지 모병으로 인원이 차는 대로 대대에서 연대로 확대 개편했다. 국방경비대는 이들 각 도의 경비대를 총괄지휘하기 위한 경비대총사령부를 설치해 송호근 대령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행진하고 있다.

 

국방경비대 자부심 대단했으나 좌익의 온상이기도 해

국방경비대는 국가의 초석이 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으나 한편으로는 좌익세력의 온상이기도 했다. 미군정이 모병 시 신원조회를 하지 않아 좌익사건에 연루된 사람들까지도 얼마든지 국방경비대에 입대할 수 있었고 일단 국방경비대원이 되면 경찰도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남로당 도당부가 계획적으로 청년당원을 경비대 사병으로 투입하거나 부대 내에 세포조직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국방사령부는 1946년 3월 29일 국방부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그 무렵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제1차 미소공동위에 참석한 소련 대표가 “독립 정부에나 있는 국방부를 왜 두느냐”고 항의하는 바람에 1946년 6월 15일 ‘통위부’로 개칭되었다. 더불어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는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했다.

 

육군사관학교 1946년 개교 후 현재까지 4단계 큰 변화 겪어

육군사관학교는 국방경비대 사관학교(1~7기), 단기 육군사관학교(8~10기), 4년제 육군사관학교(11기~현재), 여생도 모집(58기~현재)이라는 4단계의 큰 변화를 겪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46년 5월 1일 태릉에서 문을 연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에는 군사영어학교 교육생 60명을 포함해 88명이 입교했으나 1개월 보름 뒤인 6월 15일에 졸업한 학생은 40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육사 1기다. 국방경비대 사관학교는 다음날인 6월 16일 조선경비대 사관학교로 개칭하고 9월 24일 제2기생을 받았다.

조선경비사관학교 입구

 

박정희 전 대통령도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로서는 만주의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사에 이어 세 번째 사관학교였다. 박정희는 나이(29세)로나 경력면에서나 군 고위층에 속해야 했으나 늦은 입대로 8~9세 어린 중대장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1기부터 7기까지 1,800여 명의 생도들이 짧게는 45일, 길게는 수개월의 단기 교육을 받고 군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에 입교한 사관후보생들은 대부분 광복군, 일본군, 만주군 등에서 군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짧은 교육기간에도 불구하고 숙련도는 높았다. 교육 기간은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5일 국군 창설과 더불어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면서 다소 연장되었다.

1948년 12월에 입교한 육사 8기는 22주, 9기는 23주의 교육훈련을 받았다. 1949년에 선발된 10기(생도 1기)는 2년제 과정으로 입교했으나 교육 기간이 1년으로 줄었다가 그마저도 졸업을 1주일 앞두고 6·25가 터져 졸업도 못하고 전장으로 내몰렸다.

 

생도 2기는 “한국군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비운의 기수”

1950년 6월 1일 첫 4년제 정규과정으로 모집한 생도 2기생이 입교해 대망의 정규 사관학교 교육이 시작되는 듯했으나 25일 만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교육도 받기 전 생도 신분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육군사관학교는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휴교에 들어갔다. 생도 2기는 입학하자마자 전투에 투입되어 86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실종되었는데도 생도 1기가 육사 10기로 인정받은 것과 달리 정규 육사 기수에 포함되지 않고 지금껏 그냥 ‘생도 2기’로만 불린다.

이후 생도 2기생 대부분은 전시 장교 양성소인 육군종합학교에 편입되어 6주간 단기 교육을 받은 뒤 종합 1기와 2기로 임관했다. 생도 2기 출신들은 장교로 임관한 뒤에도 휴전 때까지 45명이 전사했다. 생도 2기생들은 1996년 육사 개교 50주년을 맞아 전원 명예 졸업장을 받고 육사 졸업생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생도 2기는 1기와 더불어 여러 전투에서 격전을 치르며 죽어가 “한국군 현대사의 비극을 상징하는 비운의 기수”로 불린다. 육사 생도들은 1기부터 10기까지 배출된 5,735명의 장교 가운데 1,310명이 6·25 때 전사했다. 세계적으로도 육사 출신이 한 전쟁에서 3년 만에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린 사례는 없었다.

 

5·16 쿠데타 후 ‘육사=출세 가도’ 공식 생겨

육사는 전쟁의 와중에도 1951년 10월 31일 경남 진해에서 4년제 사관학교로 다시 개교하고 1952년 1월 20일 개교식을 거행함으로써 정규 사관학교로서의 위상을 확보했다. 개교식에 앞서 1월 2일 입학한 200명의 생도들이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배출한 그 유명한 육사 11기다. 이들은 1955년 소위로 임관해 25년 뒤 한국 정치의 핵심세력으로 급부상했다. 11기는 두 대통령을 포함해 대장을 5명 배출했다. 중장·소장만 20명에 달한다. 장관급과 국회의원도 수두룩하다. 육사는 휴전 직후인 1954년 6월 23일 현재의 태릉으로 복귀해 옛 화랑의 얼과 정신을 이어받고자 ‘화랑대’로 개명했다.

서울 태릉 화랑대에서 열린 육사 11기 졸업 임관식 (1955년 10월 4일)

 

1998년 3월에는 개교 이래 처음으로 여생도(58기)가 입교함으로써 ‘금녀지대’라는 성역을 깼다. 육사 졸업자 중 1,620여 명은 6·25와 베트남전 등 각종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처럼 육사 출신들은 남북 군사대치의 현장에서 안보의 핵심 역할을 맡았으나 1961년의 5·16 쿠데타 이후에는 ‘최대 파워 엘리트’로 부상, ‘육사=출세 가도’라는 공식을 남겼다. 육사 출신 엘리트들은 일사불란한 군사문화로 우리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데 일조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한국 정치를 굴절과 파행으로 몰아갔다는 부정적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다.

 

5·16 쿠데타 성공의 주역은 육사 8기

5·16 쿠데타 당시 군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던 육사 기수는 육사 8기였다. 그들이 집단 움직임을 보인 첫 사례는 1960년 4·19가 일어나고 그로부터 20일 뒤인 5월 8일 박정희의 조카사위 김종필 중령을 비롯 김형욱 등 8명의 육사 8기 장교들이 정군(整軍)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돌리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정군 운동은 선배들에 비해 진급이 늦었던 육사 8기생들의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육사 8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처음 배출된 정규 육군사관학교라는 자부심이 컸다. 육사 8기와 더불어 변혁을 꿈꾼 또 다른 그룹은 대령급의 육사 5기였다. 그 시점에서 육사 8기, 5기와 박정희의 의기투합은 한국 사회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61년 5월 1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 800여 명이 5·16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하고 있다.

 

5·16쿠데타 성공 후 김종필을 중심으로 육사 8기가 독주하자 함께 쿠데타를 주도한 5기와 8기 사이에 권력투쟁의 조짐이 보였다. 박정희의 신뢰를 받고 있는 육사 8기가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대해 거부감을 품은 것과 달리, 육사 5기는 장도영 측에 심정적으로 동조했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박정희·육사 8기, 장도영·육사 5기로 나뉘어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육사 8기는 혁명 직후부터 장도영에 불만이 많았다. 나이는 1~3세, 군 경력은 2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계급은 중령과 중장으로 한창 벌어져 있었다. 쿠데타 감행 전, 장도영을 쿠데타 지도자로 추대하려고 했을 때 장도영이 확답을 하지 않고 애를 먹였다고 생각한 육사 8기들은 쿠데타 후까지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는 장도영을 처단해야 한다는 데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같이했다.

육사 8기 졸업 사진 (1949년 5월 23일)

 

육사 5기는 독주하는 김종필로부터 중앙정보부장 직책을 빼앗기로 뜻을 모았다. 최악의 경우 박정희 소장마저 제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1961년 7월 3일을 D-데이로 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한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은 박정희의 양해 하에 선제공격을 가했다. 자칫 무방비 상태에서 당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것이 7월 9일 발표된 ‘장도영 반혁명 음모사건’의 배경이었다. 이로써 장도영과 육사 5기는 자연스럽게 권력 핵심에서 물러나고 역사 전면에서 퇴장하는 불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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