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낙수장’ 완공

↑ 낙수장 전경

 

당당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낸 미국 건축의 자존심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는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 독일의 미스 반 데어로에와 함께 ‘근대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이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를 꼽을 때도 빠지지 않는다. 라이트는 전 생애에 걸쳐 1,000여 점의 건물을 설계했다. 이 가운데 400여 점의 건물이 온전하게 남아있고 이 중 3분의 1 이상이 사적(史蹟)으로 등록되어 있다. 라이트와 관련된 논문과 저작이 2,000편이 넘을 정도로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건축계의 전설이었다.

라이트는 미국 위스콘신주 리치랜드센터에서 태어났다. 1885년 입학한 위스콘신대에 다니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20살이던 1887년 현장에서 직접 배우겠다는 각오로 기회의 땅 시카고로 떠났다. 당시 시카고는 1871년 일어난 대화재로 도시의 70%가 불에 타버려 재건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런 시카고는 라이트에게 도전과 기회의 땅이었다.

시카고에서 그는 몇몇 건축 사무소를 전전하다 1888년 루이스 설리번의 건축 사무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건축 실무를 배웠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아름다움은 기능이나 형태에 내재된 것’이라는 기능주의를 주창한 설리번의 가르침에 ‘자연’이란 요소를 결합해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정립했다. 이후 독립해 1895년 시카고에 건축 사무실을 열었다. 그는 건축이 자연과 소통하고 융합해야 한다는 ‘유기적 건축 이론’을 더욱 단단하게 구축하며 역사와 자연과 인간을 건축 공간 속에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가 말하는 ‘유기적’이란 “건축이 환경과 혼화되어야 하고 건축이 놓여 있는 대지와 자연이 영감을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는 “미국의 건축은 미국의 자연과 생활에 적합한 것이어야 한다”며 유럽 건축에 경도된 미국의 건축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성공적인 건축가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여겨온 유럽 유학도 거부하며 독자적인 유기적 건축 이론을 수립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유럽 중심의 근대건축 흐름에서 당당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지켜낸 미국 건축의 자존심이었다.

 

건물이 주위 환경과 일체를 이뤄야 한다고 믿어

뉴욕의 높은 건물들에 대해서도 “철골구조에 그럴듯한 외관을 입혀 놓은 거대한 덩어리”, “빌딩의 진정한 목적과 특성을 위배한 것”이라고 비판하며 독자적인 자신만의 건축관을 고집했다. 그는 건물이 주위 환경과 일체를 이뤄야 한다고 믿었다. 수직적인 형태의 구식 건물에서 탈피해 주위 환경과 어울리며 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수평적 형태의 건물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건물이었다. 담, 화단, 울타리, 정원 등도 낮은 수평을 강조했다.

그는 유기적 건축 이념을 1900~1909년에 선보인 전원주택 시리즈 ‘초원의 집’과 1930년대에 지어진 교외 주택 ‘유소니언 하우스’ 등에서 실현했다. 특히 ‘초원의 집’ 시리즈는 자연의 흐름을 건축에 담은 초기의 주택 작품들로, 주택들이 시원스럽게 물 흐르듯 설계되어 20세기 주택 설계의 신기원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아 건축가로서 제1 황금기를 구가했다.

반면 개인적으로는 1909년 가족을 버려두고 고객이자 친구의 아내인 체니 부인과 유럽으로 밀월 여행을 떠나 지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부정을 정당화했다. “결혼은 인간의 굴레가 아니다. 간통은 세상과 맞서는 진실”이라며 사회의 위선적 태도가 잘못이라고 맞섰다. 그는 결국 체니 부인과 결혼했으나 그가 도제 교육을 위해 위스콘신주 스프링그린에 지은 ‘탤리에신’ 캠프에 1914년 그의 하인이 불을 질러 체니와 2명의 자녀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라이트는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까지 머물며 제국호텔 건축에 매달렸다. 그는 일본에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내진 설계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1923년 완공된 제국호텔은 다시 한 번 그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다. 일부 신관은 1922년 7월 먼저 개장한 뒤 전관은 1923년 9월 1일 개장할 예정이었으나 하필 그날 관동대지진이 도쿄를 강타해 개장식은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호텔만은 멀쩡해 많은 사람의 피신처로 제공되어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라이트는 1년 전 미국으로 돌아가 지진 순간에는 도쿄에 없었지만 대지진에도 무사했다는 제국호텔의 소문이 알려지면서 찬사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그의 건축 기술에 놀라움을 표시하며 불사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제국호텔 인근의 건물들도 무사한 것으로 미루어 운도 따라준 것으로 보인다.

 

낙수장, ‘20세기 최고 걸작’ 극찬 받아

라이트가 68세이던 1935년 설계하고 1936년 공사를 시작해 1939년 완공한 펜실베이니아주의 ‘낙수장’은 제2의 황금기를 알리는 대표작이었다. 에드거 카우프만의 의뢰로 지어졌기 때문에 ‘카우프만 저택’이라고 불러야 하나 사람들은 폭포와 어우러진 건물이라고 해서 ‘낙수장(Falling Water)’이라고 불렀다.

건축주 카우프만은 피츠버그의 대표적인 카우프만 백화점의 소유주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피츠버그의 신문이 1면에 ‘상인의 왕자’를 잃었다고 애도할 정도로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다.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는 당초 건축가의 꿈이 없었는데도 라이트의 ‘자서전’을 읽고 감동해 1934년 라이트의 건축사무소에 입사했다. 그 무렵 아버지 카우프만은 애팔래치아 산맥의 대형 바위 사이에서 2단, 3단으로 떨어지는 베어런(Bear Run) 폭포에 크게 매료되어 일년 내내 그 폭포를 보며 지낼 수 있는 별장을 짓고 싶어했다. 아들은 아버지를 설득해 라이트에게 낙수장 설계를 의뢰했다.

라이트는 강과 바위, 폭포와 숲이 하나가 되도록 설계했다. 거실 바닥은 폭포 위에 걸치도록 하고 거실에는 강으로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마련함으로써 태고부터 그 땅에 있었던 바위를 인간이 지은 건축과 직접 이어지게 했다. 라이트가 카우프만에게 처음 설계도면을 보여주었을 때 카우프만은 “나는 이 집이 폭포가 보이는 곳에 놓여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폭포 위에 걸친 집이라니!”하며 놀라워했다. 라이트는 “당신은 폭포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단지 폭포를 보는 것만이 아닌, 당신 생활의 일부가 되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낙수장은 현대 문명이 잃어버린 인간 공간의 원형을 아름다운 자연과 인공의 공간 형식으로 보여준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낙수장에서 자연은 건축과 대립되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이 자연스럽게 건축 공간이 되고 건축 공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상호 교감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이트가 죽고 6개월 후 개관된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도 그가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으로 20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형문자로 건축사에 기록되었다. 라이트는 이 미술관을 통해 건축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건축물을 탄생시켰고 200년 앞선 예언자로 추앙받았다.

라이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1993년 오페라 ‘빛나는 이마’와 2000년 공연된 연극으로도 세상에 소개되었다. 2000년 미국건축가협회가 ‘20세기 10대 건축물’을 선정했을 때 그 중 4개가 라이트의 건축물이었다. 낙수장, 구겐하임 미술관, 로비하우스, 존슨 왁스 빌딩이 그것이다. 1955년 세상을 떠난 카우프만은 낙수장에 있는 가족묘에 묻혔다. 아들 카우프만 주니어는 상속받은 낙수장을 1963년 환경보전협회에 기부해 낙수장은 현재 환경보전협회가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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