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은 금성” 이미지 확실히 심어
LG전자의 전신 금성사의 초창기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 가전산업의 역사다. 1959년의 라디오를 비롯해 1960년대에 제조된 금성사의 가전제품 대부분이 ‘국내 최초’였기 때문이다. 1958년 10월 1일의 금성사 창립은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구인회 LG그룹 창업자가 그전부터 설립․운영해온 ‘금성합성수지공업사’가 출발점이지만 LG전자는 회사명을 금성사로 개칭한 1958년 10월 1일을 공식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회사 창립에 앞서 구인회는 서독의 기술자와 전자기기 설계 및 제작 계약을 체결했다. 1차 목표는 라디오와 전자부품 생산이었다. 시중의 전자제품이라곤 외제 라디오와 미국산 수입 TV가 전부일 때였다. 금성사 연구진은 1년 남짓 연구에 매달린 끝에 1959년 8월경 시제품을 완성하고 같은 해 11월 15일 마침내 국내 첫 진공관식 라디오 ‘A-501’ 80대를 생산했다. 모델명 ‘A-501’에서 ‘A’는 교류전원(AC), ‘5’는 채택된 진공관 수, ’01’은 국산 제1호를 뜻했다. 라디오 가격은 당시 쌀 1가마 가격이 1만 9,000환일 때 2만 환이었다.
‘A-501’은 60% 이상의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진공관과 스피커 등 핵심 부품만 외국에서 수입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컸다. 부품 국산화율을 60%로 높일 수 있었던 것은 LG그룹의 모회사로 1947년에 설립된 ‘락희화학’이 축적해온 플라스틱 기술 덕분이었다. ‘락희화학’은 1952년부터 다양한 플라스틱 제품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기 때문에 사출금형 기술에서만은 국내 최고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술 덕에 라디오는 5가지 색깔의 케이스로 만들어졌고 소비자는 취향에 따라 원하는 색깔을 고를 수 있었다.
라디오가 생산된 1959년은 100V 전압을 유지하는 집이 드물 정도로 전력 상태가 좋지 않았다. 60~70V로 떨어지는 것은 예사였고 50V까지 내려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방송국 사정도 열악해 서울 외곽 지역으로 조금만 나가도 라디오 전파가 잡히지 않았다. 금성사 라디오는 이런 점을 감안해 50V 전압에서도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11월 말부터는 새 모델을 잇따라 출시하고 1960년에도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생산했으나 당시는 전자제품을 살 만큼 여유 있는 소비자가 드물었기 때문에 시장의 반응은 차가왔다. 구매력이 있는 부유층은 품질이 떨어지는 국산 라디오 대신 밀수를 통해 들어온 일본산이나 미국산 제품을 찾았다.
핵심 부품만 외국에서 들여왔다는 점에서 의미 커
당시 라디오 제조 기술은 미국과 일본이 한참 앞서 있었다. 우리가 초보적인 진공관식 라디오를 생산하기 수년 전에 이미 미국에서는 1954년 12월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생산되었고 일본에서도 1955년 8월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소니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금성사의 초기 제품은 접촉 상태가 나빠 소리가 끊기는 일이 잦았다. 케이스 색깔도 햇빛을 받으면 누렇게 변색되었다. 그렇더라도 금성사가 라디오를 처음 생산한 1959년은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원년으로 삼을 만큼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라디오 판매 부진으로 금성사는 1961년까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그러자 내부에서 “락희화학이 플라스틱으로 번 돈을 금성사가 다 까먹는다”는 불만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금성사 존폐론까지 대두될 정도로 위기에 빠진 금성사를 살린 것은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 정권이 공표한 ‘국산 가능한 라디오 부품의 수입금지 및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안’은 이런 금성사에 던져진 구원의 생명줄이었다. 4․19후 탄생한 민주당 정부가 1961년 4월에 마련한 법안이라는 점에서 민주당 정부에도 일정한 공로가 있다.
법안 공표 후 외제 라디오는 된서리를 맞았다. 이 때문에 밀수가 성행하자 1961년 7월 박정희 의장이 강력한 밀수 단속을 지시했다. 덕분에 금성사는 확실히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박정희 정부가 1962년 7월부터 군사정부의 시책을 농어촌에 알리는 공보활동 강화를 위해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라디오 판매는 봇물처럼 터졌다. 연 1만 대에도 미치지 못한 판매량은 1962년에는 13만 7,000대로 급증했다. 이후 금성사는 선풍기(1960.3), 자동전화기(1961.7), 냉장고(1965.1), 흑백TV(1966.8), 에어컨(1968.3) 등을 국내 최초로 잇따라 선보이며 “가전은 금성”이라는 확실한 이미지를 심어나갔다.
특히 1966년 8월 1일에 출시한 국내 최초 흑백TV ‘VD-191’은 진공관식 TV(19인치)였는데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기업체 대졸 초임이 1만 5,000원 정도일 때 쌀 27가마를 살 수 있는 6만 3,500원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공개 추첨을 통해 구매자를 결정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이런 관심 속에 1966년 말까지 5개월 동안 팔려나간 TV는 1만 대나 되었다.
독주하는 금성사에 경쟁자가 출현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1967년 전자산업에 진출한 대한전선이 1968년부터 냉장고, 에어컨, 라디오, 훅백TV를 출시하며 금성사를 추격하더니 1969년 2월 삼성전자까지 설립됨으로써 한국의 전자산업은 상호 경쟁하며 함께 성장하는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금성사는 1973년 3월 국내 전자업계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하고 이후에도 꾸준히 세계 시장에서 역량을 키워, 1978년 11월 가전업계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한국의 가전산업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