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우리나라 최초 여류 비행사 박경원 추락사

↑ 박경원의 추락사를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1933년 8월 9일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은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2년간 간호사로 일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늘 하늘에 있었다. 결국 1924년 9월 다치카와 항공학교에 입학해 11시간동안 단독비행을 할 정도로 우수한 기량을 보였다. 이런 박경원의 이름이 일본 신문에 기사화된 것은 1927년 1월, 3등 조종사 시험에 합격하면서였다. 이 시험에서 ‘아폴로 200마력기’를 절묘하게 몰아 시험관들을 경탄시키자 1월 30일자 도쿄 아사히신문은 ‘조선출신 여성비행사 1호 탄생’이란 기사로 그의 존재를 알렸다.

1928년 7월에는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된 비행경기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 숙원이던 2등 비행사 시험에 합격했고, 1931년 11월 24일에는 런던에서 1만 8000㎞ 비행기록을 세운 영국 여자비행사 에이미 존슨의 오사카·도쿄 간 비행을 영접·유도하기도 했다. 1933년, 고국의 하늘을 날고 싶었던 박경원에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을 경유해 중국 창춘(長春)까지 ‘일·만(日·滿)친선, 황군위안’을 위한 장거리 비행이 허락된 것이다. 몰고갈 비행기가 없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고이즈미 마타지로 체신대신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신사참배도 함께 하는 등 만남이 잦아져 둘 사이의 염문이 일본 신문 가십란에 실릴 정도였다.

1933년 8월 7일 오전10시35분, 박경원이 도쿄·서울·만주·창춘에 이르는 장장 2000㎞의 비행을 위해 ‘청연호’를 몰고 고국을 향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그러나 구름이 짙게 덮힌 악천후로 이륙한지 50분만에 하코네 중턱에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청연호의 동체는 두동강났고 박경원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채 핸들을 잡고 자는 듯 숨져있었다. 1년 뒤 그의 격납고에서 발견된 일기에는 ‘나의 연인은 비행기, 창공은 즐거운 가정이다…’라고 씌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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