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나석주는 그야말로 홍길동 같은 존재
나석주(1890~1926)가 중국발 여객선을 타고 인천항에 내린 것은 1926년 12월 26일이었다. 실로 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그의 입국증에는 중국 산동성 출신의 35세 중국인 마중덕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나석주라는 이름이 수년 전부터 일경의 체포 대상 리스트에 올라있기 때문에 중국인으로 위장한 것이다.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가 일찌감치 민족의식에 눈을 뜬 것은 김구가 황해도 안악에 설립한 양산학교에 다니면서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1913년 만주로 건너가 이동휘가 설립한 나자구 무관학교를 수료했다. 1915년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1917년 동양척식회사(동척)가 집안 대대로 대물림해온 왕실 소유의 경작지를 빼앗는 횡포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인근 겸이포로 이주해 미곡상을 차려 생활의 안정을 찾았지만 1919년 3․1 운동 때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되어 미곡상의 문을 닫아야 했다.
출옥 후에는 황해도 사리원으로 옮겨 밖으로는 정미소를 운영하고 안으로는 동지를 모아 독립운동을 계획했다. 1920년 1월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과 의열 투쟁 조직을 결성하고, 사리원의 부호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일경 1명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일부 단원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지만 나석주는 포기하지 않고 부호들을 찾아가 거액의 군자금을 끌어모았다.
나석주가 이처럼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군자금을 모으고 일경과 친일 관리를 살해하자 일경이 나석주 검거에 골머리를 앓았다. “1921년 1월 이래 나석주를 잡고자 동원한 경관이 연인원 1만여 명이나 되고, 서류 조회 등이 200여 차례, 수만 통에 달할 것”이라는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나석주는 그야말로 홍길동 같은 존재였다.
일경이 황해도의 사리원, 재령, 안악, 봉산, 장연, 구월산 등 일대에 무장 병력을 배치해 수사망을 좁혀오자 나석주는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1921년 10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상해에서 만난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나석주를 “제자이자 동지”라고 각별하게 대했다. 당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려는 김구의 구상에 따라 나석주는 1923년 중국의 한단 군사강습소에서 사관 훈련을 받고 1924년 중국군 초급장교로 임관해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천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을 하고는 자살하겠다”
나석주가 자신의 목숨을 조국 광복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1926년 5월 김구의 권고로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만나면서였다. 김창숙은 나석주에게 폭탄과 권총 등을 건네면서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척이 동지의 손에 폭파되면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라며 죽음을 무릅쓴 거사를 제안했다. 동척은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해 우리 농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었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6일 중국인으로 위장해 인천항으로 잠입하고는 남대문통 5정목에 있는 중국 여관에 짐을 풀었다. 12월 27일에는 “의열단의 일원으로 왜정의 기관을 파괴하려 한다”며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다”는 유서 형식의 편지를 조선일보에 보냈다. 12월 28일 오전 나석주는 신문지로 10연발 권총을 말아 싸고 윗옷 주머니 양쪽에 폭탄을 한 개씩 넣고 복대에 100발의 실탄을 채우고는 여관을 나섰다.
오후 2시 5분 나석주는 식산은행 본점(외환은행 본점 자리)으로 들어가 한 사무실에 폭탄을 던졌다. 하지만 폭탄은 뒷벽 기둥을 맞고 구르기만 할 뿐 터지지 않았다. 훗날 일경은 나석주가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져서 불발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그보다는 폭탄을 입수할 때 시험을 하지 않고 수개월간 보관하다가 뇌관에 녹이 슬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의견이 많다.
나석주는 곧바로 식산은행을 빠져나와 인근의 동척(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으로 기민하게 이동했다. 오후 2시 15분, 동척 입구와 1층에서 2명의 일인에게 권총을 쏘고 곧바로 2층으로 뛰어올라가 권총을 난사했다. 나머지 폭탄 1개를 던진 뒤 쏜살같이 1층으로 뛰어내려와 다시 일본인들에게 총격을 가하며 밖으로 뛰쳐나왔으나 이번에도 폭탄은 불발이었다.
나석주는 황금정(을지로) 거리를 내달리다가 마주친 일경을 향해 총으로 쏴 쓰러뜨렸다. 몰려오는 일경들과 총격전을 벌이며 도주했으나 점점 일경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황금정 2정목 삼성당약국 앞에서 운집한 군중을 향해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고 외치고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3발 중 2발이 가슴을 관통하고 1발은 폐에 박혀 길바닥에 쓰러지는 그의 품에서 66발의 탄환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일경은 아직 숨이 꺼지지 않은 나석주를 급히 병원으로 데려가 취조 끝에 나석주임을 확인했으나 나석주는 오후 4시쯤 숨을 거두었다. 그사이 일경을 포함해 3명이 죽고 4명이 중상을 입어 황금정 거리는 선혈이 낭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