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중세 말 휴머니즘을 대표한 에라스무스 사망

중세가 저물던 무렵, 휴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에라스무스다. 에라스무스는 주로 고전에서 구현된 자유롭고 인간적인 이상을 갈구했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의 부패상이 눈에 들어오자 교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사람들의 종교개혁 욕구를 부추겼다. 인간성에 대한 통찰은 물론 유머와 풍자를 담아 16세기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히는 ‘우신예찬(愚神禮讚)’에서는 교회의 악폐를 꼬집었다.

마틴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저술에서 가르침을 얻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루터를 깨운 것도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판 신약성서였다. 이 때문에 교회가 에라스무스를 가리켜 “루터와 츠빙글리가 부화시킨 알을 낳은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항변이 걸작이다. “내가 낳은 건 달걀인데 루터는 다른 새의 알을 부화했다.”

1517년의 종교개혁은 유럽을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에라스무스 역시 종교개혁을 갈망했으나 그가 몸을 담기에는 루터의 주장이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럼에도 루터를 어려움에서 구해내려 하자 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이중거래를 한다”며 분명한 선택을 요구했다. 루터 역시 자신의 편에 설 것을 강요하는 최후통첩을 에라스무스에게 보냈다.

꼭 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시간이 갈수록 루터의 민족주의, 광신적 신앙, 불관용 등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루터를 포용하기에는 그의 기질이 너무 온건하고 이성적이었다. 루터와 결별했다고 해서 교회가 그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었다. 그의 사후에 ‘우신예찬’은 금서목록에 들어갔고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를 ‘불경스런 이단자’로 정죄했다. 1536년 7월 12일 67세로 스위스 바젤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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