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재일 조총련 결성

재일 교포단체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은 종전 직후인 1945년 10월 15일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을 망라해 결성한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련은 결성 한달도 안돼 주도권이 일본공산당원 김천해를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좌익이 득세하는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조련은 일본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천황제 타도’를 외치고 친일파 규탄활동을 벌이며 자체 치안대까지 둘만큼 제법 체계적으로 운영됐으나 불법행위와 폭력성 때문에 1949년 9월 8일 일본 공안당국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1951년 1월 일본 공산당 내 비공식 조직인 ‘민전(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으로 재출범했으나 1954년 8월에 북한의 남일이 한덕수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주도권이 소수파였던 한덕수로 넘어갔다. 한덕수는 자파 세력을 중심으로 1955년 5월 25일, 조총련을 결성한 뒤 2001년 사망할 때까지 의장으로 전권을 행사했다. 그의 생존시 조총련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북한의 해외 공작기지로서 각종 활동을 펼치며 재일 친북 교포들의 중심역할을 해 한때는 재일교포 사회의 80% 이상을 구성원으로 둘만큼 번창했다.

번창한 배경은 돈과 교육과 인질이었다. 산하 기관인 조선은행신용조합은 한때 180개 지점과 2조 5000억 엔의 수신고를 기록하며 북한의 돈줄 역할을 했고, 교육기관은 조선대학교를 정점으로 150여 개의 초중고교를 운영하며 4만 6000여 명에 달하는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특히 1959년 12월부터 시작된 북송사업은 조총련의 수입에 큰 역할을 했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9만 3000여 명의 북송교포는 일본 내 가족들이 조총련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도록 한 사실상의 인질이었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사망 후의 김정일 세습과 1997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이후 급속한 국적전향과 잇단 조직이탈, 재정기반 파탄으로 민단에 앞 자리를 내주고는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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