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프랑스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 시작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아 사실상 승리를 확정한 프로이센군은 1870년 9월 중순부터 파리 공략에 나섰다. 4개월을 버텼으나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었던 프랑스는 1871년 1월 28일 항복을 선언했다. 프로이센군이 개선문으로 당당히 입성할 때 파리 시민들은 집집마다 검은 깃발을 걸거나 밤이 되도 등불을 켜지 않는 방법으로 무언의 저항을 계속했다. 프랑스군은 무장해제당하고 정부는 비스마르크의 뜻대로 재조직됐다.

2월 8일 실시된 국민의회 선거에서는 보수파인 왕당파가 공화파에 압승을 거둬 국민의회도 보수적인 의원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대도시와 파리 만은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했고, 파리 방위를 위해 조직된 국민방위군은 해산을 거부했다. 어느덧 파리는 국민의회의 통치권 밖에 놓였다. 점차 급진적인 파리와 보수적인 의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파리 시민들은 곧 닥쳐올 국민의회 군대와의 피할 수 없는 충돌에 대비했다.

파리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85명의 의원을 선출해 자치구를 뜻하는 ‘코뮌’을 발족시켜 프로이센에 굴복한 꼭두각시 정부를 향해 분노를 표출시켰다. 노동자·학자·저널리스트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코뮌의원은 친(親)프로이센·부르주아 정부에 철저 항전을 선언했다. 혁신적인 정책들을 속속 발표하면서 파리 대주교를 살해하는 등 보수 세력에 대한 과격한 투쟁도 서슴지 않아 곳곳에 유혈이 낭자했다. ‘적기(赤旗)’가 처음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관망하던 국민회의 군대가 파리 공략에 나선 것은 5월 21일이었다. 이른바 ‘피의 일주일’로 불리는 대살육전의 시작이었다. 시민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튈르리궁·오르세궁 등을 불태우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5월 28일 저항이 끝날 때까지 최소 2만 여명이 학살돼 센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일주일 만에 진압된 ‘파리코뮌’을 놓고 사회주의자들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라며 치켜세운 반면 우파들은 ‘난동의 온상’이라며 비난했다. 이때 이후 파리는 1977년까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시장(市長)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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